일상

염색을 했다

by 박온유

염색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이유를 붙일 만큼의 사건은 아니었다.그냥 시간이 그렇게 됐다.

전에 했던 염색이 자라나오고, 경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다시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다.

머리를 염색한다는 건 나한테 늘 그런 식이었다.

어떤 결심이나 전환점이라기보다는, 생활의 리듬에 가까운 것.


그런데 요즘은 마음이 좀 무겁다.

회사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고, 하루하루가 매끈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크게 터지는 사건이 있는 건 아닌데, 계속해서 작은 돌멩이들이 신발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하나하나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매일 반복되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발을 디딜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괜히 예민해지고, 별일 아닌 말에도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도 나는 출근을 하고, 할 일을 하고, 필요한 말은 하고, 웃어야 할 땐 웃는다.

겉으로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에서는 계속 뭔가가 눌려 있다.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는 어렵고, 누구한테 털어놓기엔 애매한 무게.

그래서 더 그냥 안고 가게 되는 마음.


그런 상태로 염색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고, 익숙한 냄새가 나고, 거울 속의 나는 늘 보던 얼굴이다.

염색약이 발라지고, 기다리는 시간이 흐른다.

그동안에도 생각은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회사 일, 해야 할 일, 지나간 말들, 앞으로의 일정 같은 것들이 여전히 떠오른다.

다만 그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그리고 모든 게 끝나고, 머리를 말리고, 거울을 다시 봤을 때.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냥 그 색이 눈에 들어왔다.

빛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결,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느낌, 손으로 만졌을 때의 감촉.

그 몇 분 동안은 회사도, 사람도, 복잡한 마음도 전부 잠깐 뒤로 밀려났다.


행복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고, 너무 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좋았다. 아무 이유 없이, 설명 없이 그냥 좋았다.

“아, 예쁘다”라는 생각 하나로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

요즘처럼 마음이 계속 무거운 상태에서는

그런 감각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더 귀하다.


이게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내일이 되면 또 출근을 해야 하고, 여전히 쉽지 않은 일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염색한 머리로 회사에 가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는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기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는 느낌.


머리를 염색하고 나서의 그 짧은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익숙해지고, 색은 점점 빠지고, 다시 일상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이 실제로 있었고,

내가 분명히 느꼈다는 사실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 속에서도,

나한테는 그런 작은 장면들이 필요하다.


요즘의 나는 대단한 각오로 하루를 버티지는 않는다.

그냥 무너지지 않기 위해, 너무 닳아버리지 않기 위해 이런 선택들을 한다.

염색도 그중 하나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좋고,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더 솔직한 선택.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변화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잠깐이라도 가볍게 해주는 행위.


거울 속의 이 머리 색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아주 잠깐 웃을 수 있었고,

잠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걸로 오늘은 충분하다고.

삶이 계속 무겁게 느껴질수록, 이런 순간 하나하나가 나를 앞으로 밀어준다.

크지 않아도, 잠깐이어도, 분명히 나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