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도의 궤적

그리고 2026년 12월 31일

by 박온유

나는 평생 아날로그시계만을 고집해 왔다.

애플이라는 생태계를 살아가기에 잠시 애플워치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숫자가 번쩍이며 바뀌는 디지털 화면에서는
시간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내게 시간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고,
끊기는 점이 아니라 이어진 선이었다.

시침과 분침, 초침이
360도의 원 위를 미끄러지듯 도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간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궤도를 함께 도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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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그저 계속 도는 것.
그 연속성만이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감각을 붙잡아 주었다.


2026년 2월 23일,
내 시계는 인생에서 가장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13년.


청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지금의 회사에 묻어왔다.
일터를 넘어 충성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 나는 정말로, 여기가 나의 궤도라고 믿었다.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헌신은 존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함은 당연함으로 바뀌었고 책임은 이유 없는 요구가 되었다.
나의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그들은 내 시간이 닳고 있다는 사실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시계의 톱니바퀴를 멈춰 세울 마지막 시한을 정했다.


2026년 12월 31일.


이 날짜는 희망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 세운
최후의 방어선이다.
그때까지도 정당함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13년간 쌓인 모든 부당함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증명하고,
이 궤도에서 스스로 이탈할 것이다.

고용노동부라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행정의 언어로 나의 시간을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말해 많이 서글프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서류와 증거와 조항으로 바뀌는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이건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이토록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프지만, 그래도 나는 그 길을 택한다.

그래서 오늘의 월요일은 유독 더 흔들린다.
시계의 초침이 한 칸 움직일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작별을 연습한다.

이 회사와의 작별이 아니라 여기서 더 버티면 부서질
나 자신과의 작별 연습이다.


나는 찰나의 숫자로 깜빡이다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360도를 돌아 다시 ‘나’라는 중심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고통스러운 회전을 선택했다.


어두운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흐르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하나만은 분명히 다짐한다.


이 좁고 긴 터널의 끝에서 나는 반드시 정직하고, 독립적이며,
내 시간의 주인으로 다시 서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