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빛 앞에서 멈춰 서고야 말았다
생명을 곁에 둔다는 건, 그 존재의 전부를 껴안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귀여운 순간만을 선택해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병들고 늙고 사라지는 시간까지 함께 건너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나는 그 약속의 무게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편이었다.
수년 동안 렉돌의 파랗고 깊은 눈빛을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사진 속에서, 영상 속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이 생겼다.
언젠가는 나도 저 눈빛을 매일 마주하며 살게 되겠지,
그런 상상을 여러 번 했다.
나는 몇 번이나 렉돌을 입양하려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적인 문제들은 너무나 분명했다.
가족의 반대, 털 날림, 병원비, 관리의 고단함 같은 것들.
그것들은 계산할 수 있었고, 대비할 수 있었고,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귀찮음이나 불편함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책임은 내가 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나를 멈춰 세운 건 다른 기억이었다.
아홉 살 무렵, 나는 잠자리를 좋아했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잠자리의 꼬리에 실을 묶어 날리면서 좋아했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가벼운 진동과 공중에서 버둥대는 움직임이 신기했다.
그게 놀이였고, 모두가 함께 그 놀이를 즐겼다.
그러다 오후 즘 잠자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그 잠자리는 죽었다.
나는 마당 한쪽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그 몸을 묻었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슬픔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낯설었고, 죄책감이라고 하기엔 말이 부족했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십여 분을 울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울었다.
누가 혼냈던 것도 아니고, 벌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닿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잠자리를 잡지 않게 되었다.
결심이라기보다는 변화에 가까웠다.
손이 먼저 멈췄고, 눈이 먼저 피했다.
그 마당과 울음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기억들처럼 흐려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생명을 곁에 둔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잠자리를 묻었던 그 마당을 떠올랐다.
내가 가진 욕심이 언제든 누군가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아무것도 아니라 믿었던 작은 곤충의 죽음이 알게 한 생명의 무게감과 상실감이
나를 괴롭힐 수도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불편한 사실.
나는 오래 우울을 안고 살아왔다.
갑작스러운 붕괴에서 겨우 회복했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일상의 온도가 급격하게 식어가는 경험과
이것이 나를 조종불능 상태로 방치하게 되는 치명적인 종류의 우울이었다.
다루는 법은 배웠지만, 완전히 분리해내지는 못했다.
문제는 그 우울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말도 못 하는 생명이 나를 바라보며 이유 없는 무기력 속에 갇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리고 반드시 찾아올 마지막이 있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이별을 미리 끌어당겨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말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마지막은 예외 없이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아홉 살의 마당처럼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움을 세어보니, 70%를 넘고 있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컸고, 기대보다 책임이 먼저 떠올랐다.
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용기를 가장할 수 없었다.
생명은 사랑 이전에 윤리다.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할 것 같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앉았다.
이 선택을 성숙하다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아쉽고, 여전히 아프다.
파랗고 깊은 눈빛을 가진 생명과의 삶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저앉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홉 살의 나는 울었고, 그 이후로 손을 거두는 법을 배웠다.
지금의 나는 안다.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생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끝까지 껴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물러나는 것도 책임이라는 것.
이 주저앉음은, 내가 그 파란 눈빛을 가진 생명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예우이자 마지막 배려다.
지금의 나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이 ‘여기까지’를 넘지 않겠다는 선택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