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Was Never One
박온유 저
The World Was Never One
1944년 7월 1일,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 호텔. 화이트마운틴 국유림 한가운데 솟은
이 빅토리아풍 호텔에 44개국에서 온 730명의 대표단이 모여들었다.
노르망디 상륙이 있은 지 25일 뒤,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호텔 로비에는 대표단의 담배 연기와 타자기 소리가 뒤엉켰고, 창밖에는 침엽수림 위로 7월의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 구름 아래에서 인류사에서 가장 야심 찬 경제 설계가 시작됐다.
회의를 주도한 두 사람이 있었다.
미국 재무부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 화이트는 조용한 관료였다.
서류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케인스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였고 자신의 가치관과 방향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비전은 달랐다.
화이트는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세계 질서의 토대로 삼으려 했다. 달러를 중심에 두고 미국을 보증인으로
삼으려 했다. 케인스는 보다 균형 잡힌 구조를 원했다. 그는 “방코르”라는 초국가 통화를 제안했다.
어떤 나라도 구조적 흑자나 적자를 지속하지 않도록 자동 조정 장치를 두자는 구상이었다. 흑자국이 조정의 부담을 지는 세계. 그것이 케인스의 이상이었다.
그 결과, 케인스의 방코르 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화이트의 안이 이겼다.
미국이 세계 GDP의 절반을 생산하고 세계 금 보유량의 3분의 2를 갖고 있던 시점에 다른 결과는 가능하지
않았다.
달러를 금에 연동하고(1온스 = 35달러), 다른 나라의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체제가 탄생했다.
IMF와 세계은행이 창설됐다.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관세를 낮추고 시장을 여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케인스는 회의 내내 심장 질환에 시달렸다. 3주간의 격렬한 협상이 그의 몸을 갈아먹었다.
그렇게 1946년 4월, 그는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 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설계한 것이 공정한 세계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전쟁보다는 나은 세계일 것이다."
그 기대는 절반만 맞았다. 전쟁은 줄었다. 그러나 공정한 세계가 만들어졌는지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논쟁 중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후 80년간 작동했다. 냉전을 거쳤고, 석유 파동을 견뎠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통과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도 기본 구조는 유지됐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시켰을 때 체제의 핵심 전제가 무너졌지만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유지됐다.
프랑스의 드골이 군함에 달러를 실어 미국에 보내며 금 교환을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닉슨은 금이라는
닻을 끊었다. 그러나 새로운 닻이 금의 자리를 대신했다.
석유가 달러로만 거래되는 “페트로달러” 체제.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달러로 팔고, 그 달러를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구조. 금이 아니라 석유가 달러의
새로운 토대가 됐다.
그 토대 위에서 세계 무역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수억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세계는 처음부터 균열을 품고 있었다.
균열은 세 방향에서 왔다.
첫째는 연결의 불평등이다.
세계화는 모든 나라를 연결했지만 그 연결의 이익은 균등하지 않았다.
둘째는 효율의 취약성이다.
공급망이 극도로 최적화될수록 한 지점의 충격이 전체를 멈추는 구조가 됐다.
셋째는 설계의 전제 붕괴다.
브레턴우즈의 설계자들이 전제한 두 가지(미국의 영구적 의지와 자유무역의 평화 보장)가 2020년대에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 세 가지 균열을 추적한다.
첫 번째 균열: 연결은 평등이 아니다
세계화의 약속은 연결이었다. 관세를 낮추고 시장을 열면 교역이 늘고 교역이 늘면 모든 참여자가 이익을
본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 그 약속의 이론적 토대였다.
포르투갈은 와인을, 영국은 직물을 만들면 둘 다 이익이다.
각자가 더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전체의 파이가 커진다.
1947년 GATT 체결 이후 수십 차례의 무역 라운드가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었다.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고 WTO가 출범하면서 자유무역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세계 경제의
작동 원칙이 됐다.
숫자는 그 약속이 지켜진 것처럼 보인다.
1990년에 약 5.5조 달러이던 세계 무역 규모는 2020년에 약 44조 달러로 성장했다. 8배. 같은 기간
세계 GDP는 약 4배 성장했다.
무역이 GDP보다 두 배 빠르게 자란 것이다.
1990년에 세계 인구의 약 66퍼센트가 하루 1.90달러 미만으로 살았다
2019년에 그 비율은 약 8.4퍼센트로 떨어졌다. 중국 하나만으로 약 8억 명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다.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성취다.
그러나 그 성공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세계 무역이 8배로 커지는 동안 최빈국이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2퍼센트 수준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세계 무역 비중은 약 3퍼센트에 머물렀다.
12억 인구가 사는 대륙의 몫이 3퍼센트. 글로벌 공급망 부가가치의 약 70퍼센트는 미국, 중국, 독일, 일본,
한국 5개국에 집중됐다.
세계화가 파이를 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이의 대부분은 이미 큰 조각을 가진 나라들에게 돌아갔다.
▸ 1990~2020 세계 무역 규모: 약 5.5조 달러 → 44조 달러, 8배 성장 (WTO)
▸ 최빈국 세계 수출 비중: 약 1.2% 수준 정체, 30년간 변화 없음 (UNCTAD, 2022)
▸ 아프리카 대륙 세계 무역 비중: 약 3% (AfDB, 2023)
▸ 글로벌 공급망 부가가치 상위 5개국 집중: 약 70% (WEF, 2021)
▸ 글로벌 절대 빈곤 감소: 36%(1990) → 8.4%(2019) (World Bank)
불평등의 양상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만 있지 않았다. 나라 내부에도 있었다.
세계은행의 경제학자 브란코 밀라노비치가 그 역설을 데이터로 보여줬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20년간, 소득이 가장 많이 증가한 집단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글로벌 소득 분포에서 중간층에 해당하는 중국과 인도의 신흥 중산층. 다른 하나는 최상위 1퍼센트에 해당하는 선진국의 초고소득층.
둘 다 세계화의 명확한 수혜자였다.
그 사이에 끼인 사람들의 소득은 거의 정체됐다. 밀라노비치는 이 그래프를 “코끼리 곡선”이라 불렀다.
소득 증가율을 백분위별로 그리면 코끼리의 옆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등(글로벌 중산층)이 올라가고, 코끼리의 코(초고소득층)가 치솟는다. 그 사이의 움푹한 부분이
선진국 중산층이다.
움푹한 그 자리에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노동자가 있었다.
웨일스의 철강 노동자가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제조업 노동자가 있었다.
한국의 중소 하청업체 노동자가 있었다.
코끼리 곡선의 의미는 하나의 그래프 이상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심리적 지형도였다.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세계화 덕분에 조금 나아졌다. 절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세계화 덕분에
훨씬 더 부유해졌다.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믿었던,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 기대했던, 열심히 일하면 보상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제자리였다.
제자리라는 것은 숫자의 정체일 뿐 아니라 기대의 좌절이었다. 기대의 좌절은 분노가 된다. 디트로이트의
풍경이 그것을 말해준다.
1950년대,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도시 중 하나였다. 인구 185만 명.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본사가 있었다. 포드 리버루주 공장은 세계 최대의 산업 단지였다.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그 공장에서 일했다. 원료가 들어가면 완성차가 나왔다.
조립 라인의 노동자 빌은(빌은 가상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내포하는 사람들은 수십만 명이다) 교외의 디어본에 집을 샀다.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었다.
차고에 차가 두 대 있었다. 주말에 보트를 끌고 미시간 호수에 갔다.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미국 중산층의 꿈이 디트로이트에서 실현됐다.
빌의 아들 마이크는 1990년대에 같은 공장에 취직하려 했다. 그러나 공장은 이미 절반이 문을 닫은 뒤였다. 마이크는 결국 월마트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시급이 아버지의 절반이었다. 의료보험이 없었다. 연금도 없었다.
마당이 있는 집 대신 아파트에 살았다. 보트는 꿈도 꾸지 않았다. 마이크의 아들 제이슨은 2010년대에
우버 기사가 됐다. 정규직이 아니었다. 자영업자로 분류됐다.
사회 안전망 밖에 있었다. 세 세대에 걸쳐 하강하는 곡선. 그 곡선이 코끼리 곡선의 움푹한 자리를 만들었다.
2020년, 디트로이트의 인구는 63만 명이었다. 3분의 1로 줄었다.
빈 집들이 블록 전체를 덮었다. 1950년대에 지어진 단독 주택들이 지붕이 내려앉은 채 방치돼 있었다.
풀이 자라 현관을 덮고, 창문이 깨진 채 판자로 막혀 있었다.
한때 미국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그 집들이 미국 제조업 쇠퇴의 기념비가 됐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디트로이트의 어떤 블록을 보면, 열 채 중 일곱 채가 비어 있다.
남은 세 채의 주인들은 떠날 수 없어서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자리는 어디로 갔는가. 멕시코 북부의 마킬라도라 공장으로 갔다.
시우다드후아레스에는 미국 기업의 조립 공장이 줄지어 있다.
리오그란데 강 건너 엘패소에서 30분 거리. 국경을 넘으면 시급이 5분의 1로 떨어진다. 노동법이 느슨해진다. 환경 규제가 완화된다.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선전과 동관으로도 갔다. 1980년 인구 3만의 어촌이었던 선전이 40년 만에 1,700만 명의
메가시티가 됐다.
화웨이, 텐센트, BYD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디트로이트에서 사라진 것이 멕시코와 중국에서 태어났다. 세계화는 부를 창출했다. 다만 그 부를 디트로이트에서 선전으로 이전시켰다.
▸ 디트로이트 인구: 185만 명(1950) → 63만 명(2020), 약 66% 감소 (미국 인구조사국)
▸ 선전 인구: 약 3만 명(1980) → 약 1,756만 명(2023) (중국 국가통계국)
▸ 중국 WTO 가입 후 미국 제조업 일자리 손실: 약 330만 개, 1999~2011 (Autor, Dorn, Hanson, 2016)
▸ 미국 제조업 고용: 약 1,740만 명(2000) → 약 1,290만 명(2020) (BLS)
방글라데시의 다카는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디트로이트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본 얼굴이었다.
라나 플라자(다카 교외 사바르 지구의 8층짜리 의류 공장 건물)가 2013년 4월 24일에 무너졌다.
1,134명이 죽었다. 2,500명 이상이 다쳤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재봉틀이 발견됐고, 재봉틀 위에 반쯤 완성된 티셔츠가 놓여 있었다.
그 티셔츠에 프리마크의 태그가 달려 있었다.
베네통의 라벨이 있었다. 월마트의 발주서가 있었다.
한 벌에 3달러를 받고 만든 옷이 뉴욕의 매장에서 30달러에 팔렸다. 부가가치의 90퍼센트가 방글라데시
바깥으로 흘러간 것이다.
라나 플라자의 노동자들은 월급이 약 38달러였다.
하루에 10~14시간, 주 6일을 일했다. 건물에 균열이 발견된 전날, 일부 노동자들이 두려움을 표했다.
관리자가 말했다. "일하지 않으면 월급을 깎겠다." 그들은 다음 날 출근했다. 건물은 그날 오전에 무너졌다.
1,134명의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세계화의 공급망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었다. 연결돼 있었지만 그 연결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그 연결은 그들의 노동을 추출하기 위해
존재했다.
라나 플라자 이후 세계는 분노했다. 일시적으로. 글로벌 브랜드들이 방글라데시 공장 안전 협정에 서명했다. 언론이 보도했다. 소비자들이 항의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의류 수출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벌에 3달러라는 가격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H&M에서 10달러짜리 티셔츠를 사는 동안 그 티셔츠를 만든 사람은 한 달에 100달러를 벌지
못했다. 연결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연결 위의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 라나 플라자 붕괴: 2013년 4월 24일, 사망 1,134명, 부상 약 2,500명 (ILO)
▸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 최저임금: 월 12,500 타카, 약 113달러 (2023년 인상 후, BGMEA)
▸ 방글라데시 의류 수출: 약 470억 달러, GDP의 약 11% (2024,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이것은 세계화가 실패한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계화가 없었다면 중국의 8억 명은 여전히 절대 빈곤 속에 있었을 수 있다.
한국의 수출 주도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의류 산업이 수백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세계화 덕분이다.
라나 플라자의 비극은 세계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가 작동하는 방식의 문제였다는 반론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 반론에도 한계가 있다. "작동 방식의 문제"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계화의 구조적 불평등을 인정한 셈이다.
시스템이 특정 집단에게 유리하고 다른 집단에게 불리하게 설계돼 있다면 그것은 참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케인스가 브레턴우즈에서 우려했던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는 채권국과 채무국 사이의 불균형이 시스템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무시됐다.
화이트의 설계가 이겼고 케인스의 우려는 80년 뒤에 현실이 됐다.
한국은 세계화의 성공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1960년대 1인당 GDP 79달러의 최빈국에서 2024년 약 33,000달러의 선진국으로. 그 성장의 동력은
수출이었다.
1962년 한국의 수출액은 5,480만 달러였다. 2024년에는 약 6,800억 달러를 넘었다.
60년 동안 1만 2천 배 이상. 가발과 합판을 수출하던 나라가 반도체와 자동차와 선박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그 변환의 속도는 인류사에서 유례가 드물다.
그러나 한국 내부에서도 세계화의 불평등은 작동했다.
서울에는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있었고, IT 산업이 성장했고,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전체 인구의 약 50퍼센트가 수도권에 몰렸다. 지방의 제조업 도시들은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일자리가 줄었다.
구미의 전자산업, 거제의 조선업, 군산의 자동차산업. 세계화의 수혜를 받던 도시들이 세계화의 역류를
맞기 시작했다.
군산이 대표적이다.
2018년 5월, GM이 군산 공장의 폐쇄를 발표했다. 직접 고용 약 2,000명,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약 1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인구 27만의 도시에서 1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에는 숫자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공장 주변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세탁소가 닫았다. 학원이 닫았다. 편의점이 닫았다.
아이들이 전학 갔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졌다.
한 도시의 생태계가 하나의 공장과 함께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GM 입장에서 군산보다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떠났다.
다만 남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 한국 수출액: 5,480만 달러(1962) → 약 6,800억 달러(2024) (한국무역협회)
▸ 한국 수도권 인구 집중: 전체 인구의 약 50% (통계청, 2024)
▸ GM 군산 공장 폐쇄: 2018년 5월, 직접 고용 약 2,000명 실직 (고용노동부)
▸ 밀라노비치 코끼리 곡선: 선진국 중산층 실질소득 1988~2008 약 0~5% 성장 정체 (World Bank, 2016)
연결의 불평등은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부에서 동시에 작동했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격차가 나라 사이에서도 나라 안에서도 벌어졌다. 세계화는 파이를 키웠지만 파이의 분배 구조는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강화했다.
이것은 상호 의존의 역설이다. 연결이 깊을수록 충격도 깊어진다.
세계화는 하나의 상상이 만든 질서였다.
모든 참여자가 같은 규칙을 믿고 같은 게임에 참여한다는 공유된 믿음.
달러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모두가 달러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듯, 자유무역이 작동하는 것은 모두가
자유무역의 규칙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게임에 참여한다는 것과 같은 조건에서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규칙은 같았다. 하지만 출발선이 달랐다. 그 차이가 80년 동안 복리로 쌓였다.
연결은 평등이 아니었다. 연결은 위계였다. 중심부가 흔들리면 주변부가 무너졌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 아이슬란드의 금융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아이슬란드의 은행들은 리먼과 직접적 관계가 없었지만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경직되면서 자금 조달이
막혔다.
인구 36만 명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국가 부도 직전에 몰렸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가 한국의 원달러 환율을 900원대에서 1,500원 가까이 끌어올렸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 이머징 마켓에서 자본이 유출됐고, 터키와 아르헨티나가 외환 위기에 빠졌다.
연결된 세계에서 충격은 언제나 중심에서 주변으로 흘렀다. 역으로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그 위계를 한국에게 가장 잔인하게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태국 바트화의 붕괴에서 시작된 위기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거쳐 한국에 도달했다.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바닥났다.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다.
195억 달러의 대가로 한국은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다.
30대 재벌 중 16개가 해체되거나 합병됐다. 정리 해고가 합법화됐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중산층 가정이 무너졌다. 이혼율이 치솟았다. 노숙자가 늘었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IMF 사태”라 불렀다. 세계화의 규칙을 믿고 참여했지만, 그 규칙이 한국을
보호해주지는 않았다.
그 경험은 한국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한국의 외환 보유고
축적으로 이어졌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약 4,000억 달러. 1997년의 교훈이 만든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그 방어벽이 모든 충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르무즈가 봉쇄되면 외환 보유고가 아무리 많아도 석유가 오지 않는다.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2020년의 마스크 대란이 보여줬다.
▸ 1997년 한국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 (IMF)
▸ 한국 외환 보유고: 약 4,000억 달러 (한국은행, 2024)
연결의 불평등이 만드는 가장 깊은 상처는 경제가 아니라 심리다.
경제적 손실은 복구될 수 있다. 심리적 상처는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디트로이트의 마이크는 아버지의 삶이 자신보다 나았다는 것을 안다. 군산의 협력업체 사장은 자신의
공장이 GM의 결정 하나로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라나 플라자의 생존자는 자신의 목숨이 티셔츠 한 벌의 가격보다 싸다는 것을 안다.
그 앎이 만드는 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존재적 모욕감이다.
"나는 이 시스템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그 인식이 세계화에 대한 분노의 진짜 원천이다.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과 앤 케이스는 미국의 “절망사(deaths of despair)”에서
약물 과다, 알코올성 간질환, 자살율이 2000년대 이후 백인 중산층 사이에서 급증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중년 남성의 사망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사망률이 꾸준히 내려가는 동안, 미국의 이 집단만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일자리를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공동체를 잃었다.
교회를 잃었다. 결혼이 줄었다. 의미를 잃었다. 세계화가 빼앗은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삶의 서사였다.
2015년에서 2021년 사이 미국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사람은 약 50만 명이 넘는다. 그 중 상당수가 오피오이드(펜타닐, 옥시콘틴 같은 합성 진통제)에 의한 것이었다.
러스트벨트의 소도시들, 애팔래치아의 광산 마을들, 중서부의 농촌 지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마을들의 공통점은 세계화의 이익에서 소외된 곳이라는 것이었다.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청년이 떠난 뒤, 남은 것은 고통을 마비시키는 약이었다.
세계화의 효율이 만든 풍요를 누리는 곳과, 그 효율이 남긴 공백을 고통으로 채우는 곳이 같은 나라 안에
공존했다. 이 현상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국의 구공업 도시들에서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졌다. 프랑스의 농촌에서 자살률이 올랐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40퍼센트를 넘으면서,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단어가 2010년대 한국 청년층의 대명사가 됐다.
N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 집, 인간관계, 꿈, 희망을 포기한 세대). 그 언어가 말하는 것은 경제적 곤란만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의 소멸이었다.
세계화는 효율을 만들었지만 그 효율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그 위계에 대한 분노가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2010년대였다.
2016년 6월, 영국이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찬성표를 던진 곳의 지도를 그려보면 런던이 아니라 북부 잉글랜드의 구공업 도시들. 선덜랜드, 미들즈브러, 스토크온트렌트 가 두드러진다. 선덜랜드에서는 찬성이 61퍼센트였다.
같은 해 11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승리를 만든 곳은 러스트벨트(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미시간)에서 그의 승리 마진은 1만 704표. 공장이 사라진 마을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2018년 프랑스에선 “노란 조끼” 시위가 파리의 샹젤리제를 마비시켰다.
시위대는 대부분 대도시 외곽과 농촌에 사는 중하위 소득층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차로를 점거했다. 이탈리아에서 오성운동이 부상했다. 스페인에서 포데모스가 의석을
얻었다. 독일에서 극우 정당 AfD가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이 모든 현상의 뿌리에는 세계화의 이익을 나눠
갖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다. 이 정치적 반란들이 공유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었다.
좌파도 있었고 우파도 있었다. 오성운동은 좌우를 넘어선다고 자임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이었지만 전통적 공화당과 달랐다.
노란 조끼는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이 공유한 것은 하나의 감정이었다.
시스템이 자신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
연결은 평등이 아니었다. 연결은 위계였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포퓰리즘”이라 불렀다. 그 명명 자체가 문제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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