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패권은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다

Hegemony Is Not Self-Sustaining

by 박온유

PANGAEA: The Inevitable Already Begun

《판게아: 이미 시작된 필연》


박온유 저





1부

왜 기존 세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Why the Old World Had to Fall




2장. 패권은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다

The Hegemony Is Not Self-Sustaining


기원전 168년 6월 22일, 마케도니아 북부 피드나의 평원.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는 아버지 필리포스

5세에게 물려받은 팔랑크스(긴 창을 든 밀집 보병 대형)를 전선에 펼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들이

자랑하던 그 전술은 200년간 지중해의 전장을 지배했다.

로마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다른 방식으로 싸웠다. 군단병들이 팔랑크스의 틈새로 파고들었고, 밀집

대형은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전투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마케도니아 병사 2만 명이 죽었다.

페르세우스는 사모트라키 섬으로 도주했다가 로마군에 붙잡혔다. 그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개선식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로마 시민들 앞을 걸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마지막 왕이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 그것은 하나의 패권이 끝나고 다른 패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로마는 이후 600년간 지중해를 지배했다. 도로를 놓았고, 법을 세웠고, 화폐를 통일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실재했다. 그러나 그 600년 동안 로마는 스스로 무너질 씨앗을 키우고 있었다.

국경이 길어질수록 방어 비용이 늘었고, 방어 비용이 늘수록 세금이 올랐고, 세금이 오를수록 속주의 불만이 쌓였다.

3세기에 이르러 제국은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바뀌는 군사적 혼란에 빠졌다.

제국을 지키는 비용이 제국이 산출하는 이익을 잠식했다. 이것이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패권은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다. 패권은 소비된다.

그 소비의 속도보다 재생의 속도가 빠른 동안 패권은 유지된다. 재생이 멈추는 순간, 패권은 쇠퇴한다.

미국의 패권도 다르지 않다.


1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균열을 추적했다. 연결의 불평등, 효율의 취약성, 설계의 전제 붕괴. 그 균열들은

세계화라는 체제 안에 내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균열만으로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균열 위에 하중이 실려야 한다.

그 하중이 패권의 비용이다.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드는 군사비,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적자, 동맹을 관리하는 데 드는 정치적 자본. 패권국은 그 모든 비용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비용이 감당 가능한 동안 패권은 유지된다.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 비용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순간, 패권은

안에서부터 흔들린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 비용의 명세서를 펼친다.

세계 경찰 역할의 직접적 비용, 달러 패권이 내장한 딜레마, 패권 피로의 구조, 그리고 로마가 남긴 마지막

교훈.



세계 경찰의 명세서


1991년 12월 25일, 모스크바 크렘린 위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깃발이 내려왔다. 그 자리에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임 연설을 하는 동안,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서는 한 장의 보고서가 돌고 있었다.

제목은 “방위 계획 지침(Defense Planning Guidance)”. 작성자는 국방부 차관 폴 울포위츠.

핵심 메시지는 하나였다. 냉전 이후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의 출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 보고서가 유출됐을 때, 뉴욕 타임스는 1면에 실었다. 비판이 쏟아졌다.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수정됐고, 표현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세계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다만 아무도 영수증을 미리 보지 못했을 뿐이다.


세계 경찰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미국은 실제로 70개국 이상에 약 750개의 군사 기지를 운영했다.

독일에 119개, 일본에 120개, 한국에 73개. 이탈리아에 44개, 영국에 25개. 냉전의 유산이었지만, 냉전이

끝난 뒤에도 대부분 유지됐다.

오히려 늘어났다. 중동에 새로운 기지가 생겼고, 아프리카에 드론 기지가 설치됐다.

세계 지도 위에 미군 기지를 점으로 찍으면, 지구 전체를 덮는 그물이 보인다.

그 그물을 유지하는 데 연간 약 550억 달러가 들었다.


▸ 미국 해외 군사 기지: 약 750개, 70개국 이상 주둔 (David Vine, Base Nation, 2021)

▸ 해외 기지 유지 비용: 연간 약 550억 달러 (미국 의회예산국, 2024)

▸ 미국 현역 군인 약 130만 명 중 해외 주둔 약 17만 명 (국방부 인력 데이터센터, 2025)


550억 달러는 숫자로만 보면 미국 국방 예산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수면 위 부분이었다. 진짜 비용은 그 기지들이 존재하는 이유, 즉 전쟁에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다.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은 20년 동안 계속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소요된 비용은 직접 전비만 약 2.3조 달러다. 참전 군인의 의료비, 장애 보상, 이자 비용을 포함하면 장기 추산액은 6.5조 달러에 이른다.

이라크 전쟁은 직접 비용 약 2조 달러, 장기 비용 약 3조 달러.

두 전쟁을 합치면, 2001년부터 2021년까지 20년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쏟아부은 총비용은 약 8조

달러로 추산된다.


▸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직접 전비 약 2.3조 달러, 장기 추산 약 6.5조 달러 (Watson Institute, Brown University, 2021)

▸ 이라크 전쟁 비용: 직접 전비 약 2조 달러, 장기 추산 약 3조 달러 (CBO, RAND)

▸ 테러와의 전쟁 총비용(2001~2021): 약 8조 달러 (Watson Institute, 2021)

▸ 참전 군인 자살: 아프간·이라크 참전 군인 자살자 약 30,177명, 전사자(약 7,057명)의 4배 이상 (Watson Institute, 2021)


8조 달러.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미국 공립학교 교사의 평균 연봉이 약 65,000달러다. 8조 달러면 미국의 모든 공립학교 교사에게 40년치

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

미국 내 노후화된 교량 약 46,000개를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500억 달러로 추산된다. 8조 달러면

그 교량을 53번 수리할 수 있다. 그 돈은 카불과 바그다드에 쓰였다.

오하이오의 도로와 미시간의 학교에 쓰이지 않았다.


전쟁의 비용은 돈만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사한 미군은 약 7,057명이다. 부상자는

약 53,000명. 그보다 더 무거운 숫자가 있다.

아프간·이라크 참전 군인 중 전쟁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약 30,177명이다. 전사자의 네 배가

넘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몸과 마음에서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포트후드(현재 포트카바조스로 개칭됨)는 텍사스에 있는 미국 최대 육군 기지 중 하나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파병된 부대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훈련받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2020년, 이 기지에서 복무 중이던 바네사 기옌 이등병이 기지 내에서 살해됐다.

그 사건이 기지의 구조적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독립 조사 결과, 2014년부터 2019년 사이 이 기지의 자살률은 육군 평균보다 높았고, 성폭력 신고 건수는

미군 내 최다 수준이었다. 20년의 전쟁이 기지와 도시와 가정 안에 남긴 것은 훈장이 아니라 상처였다.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에서 한 참전 군인의 아내가 지역 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다.

그녀는 썼다.

남편이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매일 밤 땀에 젖어 깨고, 큰 소리에 몸을 숨기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VA 병원 예약은 3개월 뒤였고, 상담사를 만나기까지 6주가 더 걸렸다고. 그 6주 사이에 남편의 동료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녀가 마지막에 물었다.

"이것이 세계 경찰의 비용이라면, 누가 그 비용을 합의한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합의한 적이 없었다. 비용은 청구되기 전에 발생했고, 영수증은 전쟁이 끝난 뒤에 도착했다.


전쟁 비용의 가장 깊은 층위는 달러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적 모욕감이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병사가 고향의 월마트에서 야간 재고 정리를 하면서 느끼는 것.

자신이 무엇을 위해 팔루자에서 총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감각.

자기 마을의 도서관이 예산 부족으로 주 3일만 문을 열고, 자기가 지켰다고 배운 나라의 수도에서는 방산업체 로비스트들이 의회를 드나드는 것을 뉴스로 보는 감각.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분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였다.


그 강제된 침묵은 결국 오피오이드라는 형태로 소리를 냈다.

퍼듀 파마가 옥시콘틴을 “중독성이 낮은 진통제”로 마케팅한 것은 1996년이었다.

처방전은 러스트벨트와 애팔래치아 지역에 집중됐다. 공장이 떠나고 병원이 줄어든 마을에서, 의사의 처방전이 유일한 위안이 됐다. 2007년에 퍼듀 파마는 마케팅 사기로 유죄를 인정했다. 벌금 6억 달러. 그때 이미

수십만 명이 중독돼 있었다.

벌금은 이익의 일부에 불과했고, 중독은 벌금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세계 경찰 역할의 비용을 감당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연방 소득세를 내는 미국 납세자 전체였지만 그 부담의 체감은 균등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투자은행가와 디트로이트의 전직 자동차 노동자가 같은 세율을 적용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계화의 이익을 나눠 가진 비율도 달랐다.


월가는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글로벌 자본 이동이 자유로워질수록 투자은행의 수익은 커졌다.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였다.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들 구글, 애플, 아마존,


그들의 이익은 국경을 넘었고 세금은 아일랜드와 룩셈부르크의 유령 법인을 통해 최적화됐다.


그 사이 러스트벨트의 도시들은 공장이 닫힌 자리에 오피오이드 위기가 번졌다.

2022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약 107,000명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 사망자의 지리적 분포는 제조업 쇠퇴의 지리적 분포와 거의 정확히 겹쳤다.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 공장이 떠난 자리에 절망이 들어왔고, 절망은 약물이 됐다.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이 이를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라 불렀다. 자살, 알코올

관련 간 질환, 약물 과다 복용.

이 세 가지가 2010년대 들어 미국 백인 비대졸 중년의 사망률을 역사상 처음으로 상승시켰다. 선진국에서

중년층 사망률이 오르는 것은 전쟁과 전염병을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 미국 약물 과다 복용 사망: 2022년 약 107,000명, 10년간 3배 증가 (CDC)

▸ 절망의 죽음(자살+알코올+약물): 2017년 기준 연간 약 158,000명 (Case & Deaton, 2020)

▸ 미국 국방비: 2025년 기준 연간 약 8,860억 달러, 세계 2~10위 합산과 유사 (SIPRI)


여기서 질문이 날카로워진다.

8,860억 달러의 국방 예산을 매년 지출하는 나라에서 왜 오하이오의 다리가 무너지고, 미시간의 식수가

오염되고, 웨스트버지니아의 젊은이들이 약물로 죽는가.


2014년, 미시간주 플린트에서 수도관이 부식돼 납이 식수에 섞였다. 약 10만 명의 주민이 오염된 물을

마셨다. 그중 상당수가 어린이였다.

납 중독은 아동의 뇌 발달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준다. 플린트의 수도관을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4억 달러로 추산됐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하루에 쓰는 군사비가 약 3억 달러였다. 플린트의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돈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의 고작 이틀치에 불과했다.


이 비교가 부당하다는 반론이 있다. 국방 예산과 지방 인프라 예산은 출처가 다르고, 예산 배정의 메커니즘이 다르며, 전쟁은 국가 안보라는 최상위 목표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론에는 늘 반론이 있다.

예산의 출처가 달라도 재원은 같다. 미국 납세자의 돈이다.

아프가니스탄에 20년간 8조 달러를 쓰는 동안 미국 내 인프라 투자는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미국토목학회(ASCE)가 미국 인프라에 매기는 성적은 2021년 기준 C-였다. 세계 최강대국의 도로와 다리와 수도관이

C-. 그 성적표가 우선순위의 왜곡을 말해준다.


한국의 납세자도 이 구조의 일부다.

한국은 미군 주둔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분담한다.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에 따라 2024년 기준 한국이 부담하는 금액은 연간 약 1.52조 원(약 11억 달러)이다.

주한미군 기지 주변 지역 경제가 미군에 의존하는 구조도 있다. 평택 캠프 험프리스는 해외 미군 기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기지 주변 상업 지구가 미군 소비에 의존한다.

한국은 미국의 세계 경찰 역할에 기대어 안보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그 비용의 일부를 분담하는 위치에 있다.

세계 경찰의 비용 구조는 미국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동맹국 전체에 걸쳐 있다.


그 비용 구조의 역설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순간이 있었다.

2021년 11월, 한국에서 요소수 대란이 발생했다. 중국이 요소 수출을 통제하자 한국의 디젤 화물차가 멈출 위기에 몰렸다. 화물차가 멈추면 물류가 멈추고, 물류가 멈추면 공장이 멈추고, 공장이 멈추면 수출이 멈춘다.

요소수 한 통. 고작 1만 원짜리 소모품이 한국 경제 전체를 흔들었다.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통해 보장하겠다고 한 것은 해상 항로의 안전이었다. 그러나 요소수 대란은 해상 항로와 상관없는 곳에서 터졌다.

중국의 수출 통제라는 미국의 군사력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서. 그렇게 세계 경찰의 우산이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었다.


▸ 한국 방위비 분담금: 2024년 기준 연간 약 1.52조 원, 약 11억 달러 (외교부)

▸ 주한미군: 약 28,500명 주둔, 평택 캠프 험프리스 세계 최대 해외 미군 기지 (주한미군사령부)

▸ 미국 인프라 성적: C- (ASCE, 2021 Report Card for America”s Infrastructure)


비용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가 됐다.


2016년 6월 28일,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펜실베이니아주 한 철강 공장 터에서 연설했다.

공장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녹슨 기둥과 깨진 유리가 배경이었다. 트럼프는 말했다. 미국이 세계를 지키는 동안 여러분의 일자리는 사라졌다고. 더 이상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그 연설을 들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빌의 손자 세대였다.

아버지의 공장이 멕시코로 간 사람들, 조부의 연금이 사라진 사람들, 마을의 약국이 오피오이드 처방전으로 돈을 버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세계 경찰”이라는 말은 자부심이 아니라 분노의 대상이었다.

내 마을의 다리가 무너지는데 왜 바그다드의 다리를 짓고 있는가. 내 아들이 VA 병원에서 대기하는데

왜 카불에 병원을 짓고 있는가.

트럼프는 그 분노에 언어를 줬다. 그 언어가 정교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였다.

30년간 양당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말을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2016년 11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러스트벨트의 세 주가 승부를 갈랐다.

세계화의 비용을 가장 많이 치른 지역이, 세계 경찰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이었다.

칸트는 1795년 《영구평화론》에서 국가 간 평화가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연합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그 평화의 전제는 각 공화국 내부의 시민이 전쟁 비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시민이 전쟁 비용을 직접 감당해야 한다면, 불필요한 전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미국은 그

전제를 우회했다.


미국의 구조는 그 전제를 교묘하게 우회했다. 전쟁 비용은 국채로 조달됐다. 즉, 미래의 납세자에게 전가됐다. 현재의 시민은 전쟁의 직접적 비용을 체감하지 못했다.

모병제 아래에서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극소수였고, 그들은 대개 러스트벨트와 남부의 저소득층 출신이었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 전쟁의 비용을 치르는 사람, 전쟁의 이익을 가져가는 사람이 모두 달랐다. 칸트가

설계한 평화의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세계 경찰은 하나의 공유된 믿음 위에 서 있었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동맹국이 그 우산 아래서

번영하고, 자유 무역과 자유 항행이 보장되는 체제였다.

그 질서를 모든 참여자가 믿는 동안 체제는 유지됐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질서도 흔들린다.

그 균열은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세계 경찰의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 비용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안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2021년 8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카불 공항의 마지막 C-17 수송기가 이륙할 때, 활주로에

매달리려던 아프간 시민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그 장면은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록됐다.

20년의 전쟁, 8조 달러의 비용, 2,400명의 미군 전사자.

미국이 세운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기 전에 무너졌다. 아프간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차에 현금을 싣고 국외로 도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세계 경찰의 명세서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20년간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그 질문들 앞에 미국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록히드 마틴의 주가는 20년간 약 12배가 올랐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교육률은 탈레반 복귀와 함께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2026년 4월, 미국은 항공모함 타격단을 파견했다.

그 파견 비용은 하루 약 700만 달러로 추산된다.

항공모함 전단 한 개의 연간 운용 비용은 약 65억 달러. 그 돈으로 플린트 같은 도시의 수도관을 16개 교체할 수 있다. 호르무즈에 항모를 보낸 표면적인 이유는 세계 에너지 수송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수송로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과 한국이다.

미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2020년대 들어 셰일 혁명 덕분에 크게 줄었다.

미국은 자국의 실질적인 에너지 수요를 위해 호르무즈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미국이 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며 해군을 보내는 이유는 더 이상 순수한 세계 경찰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스라엘 관계가 작동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중동 정책이 미국 국내 정치 구조의

핵심 변수와 결착된 방식,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동맹 역학이 대통령의 행동 범위를 설정하는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다.


결국 자국의 에너지 생존과 무관한, 누군가의 정치적 생명 연장과 뒤틀린 동맹관을 지탱하기 위해 하루 7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미국 납세자가 고스란히 내고 있다.

이것이 2026년 미국 패권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모순이자, 쇠퇴의 징후다.


▸ 미국 항공모함 타격단 연간 운용 비용: 약 65억 달러 (CRS, 2023)

▸ 미국 원유 생산: 2024년 일 1,320만 배럴, 세계 최대 산유국 (EIA)

▸ 미국 중동 원유 수입 비중: 약 7%, 2000년대 약 25%에서 급감 (EIA)

▸ 호르무즈 통과 원유의 주요 수입국: 중국(약 40%), 일본(약 20%), 한국(약 15%), 인도(약 15%) (EIA, 2025)


이 구조를 로마에 비춰보면 기시감이 밀려온다. 3세기 로마 제국은 국경 방어에 군단 병력의 대부분을

쏟아부으면서, 이탈리아 본토의 도로와 수도교는 보수하지 못했다.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비용이 제국의

중심을 잠식했다.

역사학자 피터 히더의 분석처럼, 로마의 쇠퇴는 야만족의 강함이 아니라 제국의 과잉확장에서 시작됐다.

미국이 70개국에 기지를 유지하면서 자국의 인프라가 C- 등급을 받는 것은, 3세기 로마의 변방 방어와

본토 방치 사이의 불균형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패턴이다.


호르무즈 봉쇄 이후, 미국 내부의 여론 조사가 흥미로운 숫자를 보여줬다.

2026년 4월 중순, 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 해군을 파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찬성이 약 38퍼센트, 반대가 약 47퍼센트였다.

1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반대 응답자의 가장 많은 이유는 “미국은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으므로 타국의 에너지 수송로를 지킬 이유가 없다”였다.

셰일 혁명이 미국의 에너지 자립을 가능하게 한 순간, 세계 경찰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사라졌다.

미국이 중동 원유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호르무즈를 지키는 것이 곧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호르무즈를 지키는 것은 동맹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만 비춰질 뿐이다. 그 차이가 여론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켄터키주 파이크빌의 한 석탄 광부 출신 시의원이 지역 라디오에서 말했다.

"우리 카운티의 병원이 작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응급실까지 차로 40분이 걸립니다. 그런데

우리 세금으로 페르시아만에 항공모함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건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의 카운티에서는 오피오이드로 인한 사망률이 전국 평균의 세 배였다.

그가 말하는 우선순위는 추상적 정책 논쟁이 아니었다. 이웃의 죽음이었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미국의 세계 경찰 역할이 가져온 이익은 비용보다 크지 않았는가. 맞다.

해상 항로의 안전 보장 덕분에 세계 무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미국 기업도 그 성장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달러가 기축통화로 유지되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우위가NATO를 통한

유럽 안보 보장은 냉전을 열전으로 전환시키지 않았고, 그 덕분에 핵전쟁이 없었다.

세계 경찰의 비용이 아무리 크더라도 제3차 세계대전을 막고 무역 성장을 위한 비용이라면 그것은 미국,

나아가 인류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투자가 아니었는가.


이 결론은 유효하다.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반론도 있다.

세계 경찰의 이익이 전체적으로는 비용보다 컸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과 비용의 분배가 불균등했다는 것이다. 이익은 월가와 실리콘밸리와 방산업체로 갔고, 비용은 러스트벨트와 참전 군인 가정과 미래 세대의 국채로 갔다.

총합이 플러스인 게임에서도, 누군가는 마이너스를 감당한다. 따라서 그 누군가가 더 이상 마이너스를

감당하는 것을 거부할 때, 게임의 규칙은 바뀌게 된다.

2016년이 그 거부의 시작이었다.


세계 경찰의 명세서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수렴된다. 패권을 유지하는 비용이 패권이 가져오는 이익을

초과하는 시점이 오는가. 그 시점이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역사는 그 시점이 반드시 온다고 말한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대륙의 은으로 유럽 패권을 유지했지만,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80년 전쟁의

비용이 은의 유입을 초과하면서 국가 부도를 맞았다.

1557년, 1575년, 1596년. 세 번의 디폴트.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은은 세비야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제노바 은행가들에 대한 이자 상환으로 약속돼 있었다. 패권의 이익이 패권의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구조. 그 구조가 고착되면 패권은 관성으로만 유지된다. 관성이 다하면 무너진다.


대영제국의 경우는 더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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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는 울보. 사람이 사랑이라 읽히게 될 날을기다리는 바보. 사랑하여 글을 쓰고 노래를 짓는철 들기 싫은 노래쟁이. youtube.com/@OnYou-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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