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ergy Makes the Fractures
박온유 저
Energy Makes the Fractures
1973년 10월 16일 오후, 쿠웨이트시티의 한 호텔 회의실에 열한 나라의 석유 장관들이 모였다.
회의는 짧았다. 논쟁도 없었다.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에
대한 원유 수출을 즉각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두 시간 남짓한 회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방식을 영구적으로 바꿨다.
그날 밤, 선물 시장에서 원유 가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3달러였던 배럴 가격이 12달러를 향해 올라갔다. 4배였다.
미국의 주유소 앞에 줄이 섰다. 홀수 날에는 홀수 번호판, 짝수 날에는 짝수 번호판 차량만 주유할 수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전국 제한 속도를 시속 55마일로 낮췄다.
주간 고속도로의 가로등을 껐다.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자제를 호소했다. 백악관의 복도도 어두워졌다.
세계 최강국이 석유 한 방울에 멈추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세계에게 가르친 것은 단순했다.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에너지는 통제될 수 있다. 그리고
에너지를 통제하는 자가 세계를 통제한다.
그 공식은 반세기 동안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공식이 작동하는 방식이 정교해졌다. 1973년에는
열한 나라가 동시에 움직여야 충격을 줄 수 있었다.
2006년에는 러시아 하나가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가스관 밸브 하나를 잠갔고, 유럽 전역이 긴장했다.
2026년에는 이란 하나가 39킬로미터 너비의 해협 하나를 선언으로 닫았고, 세계 에너지 시장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기가 정밀해졌다.
전략이 산탄총에서 저격총으로 바뀐 것이었다.
3장은 그 정밀화의 역사를 추적한다. 에너지가 어떻게 지정학의 언어가 됐는지를.
그 언어가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30년의 문장을 썼다가 하루 만에 지웠는지를.
호르무즈가 왜 그 언어의 가장 완성된 형태인지를. 그리고 탄소에서 벗어나려는 세계가 어째서 또 다른
의존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지를. 에너지의 지리학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에너지의 지리학
1859년 8월 27일,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의 한 농장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땅을 뚫었다.
깊이 21미터에서 검은 액체가 솟아올랐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유정이었다. 드레이크는 그날 무엇을 발견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땅 아래에서 기름을 꺼내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다른 무언가였다.
지질이 지정학을 결정한다는 원칙. 어디에 석유가 묻혀 있느냐가 어느 나라가 힘을 갖느냐를 결정한다는
구조. 드레이크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세계사의 방향을 바꿨다.
석유와 가스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 그것은 특정 지층, 특정 분지, 특정 해저 아래에 집중적으로 묻혀 있다.
페름기와 쥐라기의 퇴적층이 페르시아만과 서시베리아 평원 아래에 집중됐다. 지구의 긴 시간이 그렇게
설계했다.
인류는 그 설계를 발견했고, 그 설계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그 의존이 지정학을 만들었다.
중동이 세계 원유 확인 매장량의 약 48퍼센트를 보유한다. 러시아가 세계 천연가스 확인 매장량의 약 20퍼센트를 쥐고 있다. 이 두 지역을 합하면 세계 에너지의 지배적 몫이 거기서 공급된다. 그리고 그 두 지역은
세계에서 지정학적 갈등이 가장 만성적으로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그 허브들이 각각의 지정학적 모순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너지가 풍부한 곳은 그 에너지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끝나지 않는다.
중동은 수니-시아 갈등, 이스라엘-아랍 갈등, 미국의 전략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불안정이 구조화돼 있다. 러시아는 서방과의 대립 구도 안에서 에너지를 외교의 도구로 수십 년간 사용해왔다.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두 지역이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자원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그 역설이 에너지 지정학의 근본 구조다. 자원의 풍요와 정치의 불안이 같은 지점에 겹쳐 있다.
이것은 해결될 수 없는 구조다. 지질이 바뀌지 않는 한.
▸ 중동 원유 확인 매장량: 세계의 약 48% (BP Statistical Review, 2024)
▸ 러시아 천연가스 확인 매장량: 세계의 약 20%, 연간 생산량 세계 2위 (IEA, 2024)
▸ 호르무즈 해협 일일 통과 원유: 약 1,800만 배럴, 세계 해상 원유 무역의 약 20% (EIA, 2025)
에너지의 지리학이란 그 의존의 구조를 읽는 일이다. 어디에 에너지가 있는가.
어디에 에너지가 필요한가. 그 두 지점을 잇는 경로는 어디를 통과하는가. 그리고 그 경로를 누가 통제하는가. 이 네 개의 질문이 에너지 지정학의 전부다.
답이 단순할수록 위기는 극적이다. 에너지가 한 곳에 집중돼 있고, 소비가 다른 한 곳에 집중돼 있고,
경로가 하나뿐이고, 그 경로를 적대적 세력이 통제하고 있을 때.
2026년 4월의 호르무즈가 정확히 그 구조다.
호르무즈는 에너지 지정학의 가장 극단적 사례다.
페르시아만에서 생산되는 원유가 세계 바깥으로 나오는 경로는 사실상 이 하나의 해협뿐이다.
가장 좁은 지점의 너비는 39킬로미터다. 항행 가능한 구역은 각 방향 3킬로미터씩 총 6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 6킬로미터를 하루에 약 1,800만 배럴의 원유가 통과한다. 세계 해상 원유 무역의 약 20퍼센트다.
우회 경로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육상 파이프라인이 일부 있지만 그 용량은 호르무즈 통과량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말라카 해협이 막히면 롬복 해협으로 돌 수 있고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희망봉을 돌 수 있다. 호르무즈는
대안이 없다. 그것이 이 해협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수로로 만드는 이유다.
그 좁은 목을 통제하는 위치에 이란이 있다.
이란과 오만 사이에 놓인 해협의 북쪽 해안이 이란 영토다. 이란은 이 위치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국의 가장 강력한 비대칭 카드라는 것을.
이란에겐 핵무기도 없고, 첨단 스텔스 전투기도 없고, 항공모함도 없다. 그러나 호르무즈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침묵 속에는 말로 표현되기
전에 이미 작동하는 구조적 힘이 있었다.
이란은 수십 년 동안 호르무즈에 대해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가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위협은 실행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협상력이 된다.
고립된 나라가 세계 에너지의 목을 쥐고 있다는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역설이 반세기 동안 중동 지정학의 숨은 방정식이었다. 2026년 2월 28일, 그 방정식이 공개됐다.
봉쇄가 선언된 직후 에너지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런던 선물시장에서 브렌트유가 분당 2.3달러씩
올랐다. 싱가포르 해운 보험사들이 통과 보험료 산정을 중단했다. 두바이 LNG 터미널이 선적을 일시
정지했다. 도쿄 경제산업성에 비상등이 켜졌다. 세계는 이란의 선언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인식했다.
지리가 그것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아니라 위치가 이란의 선언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에너지의 지리학이 만드는 비대칭 권력의 본질이다.
힘이 없어도 위치가 있으면 협상력이 생긴다.
에너지의 지리는 생산지와 소비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경로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페르시아만을 출발해 한국 울산항에 도착하는 데 약 20일이 걸린다.
일본 요코하마까지도 비슷하다. 그 20일의 항해 시간이 에너지 안보의 첫 번째 변수다. 봉쇄가 선언되면
이미 항해 중인 유조선들은 도착하지만 그다음 선박들은 떠나지 못한다. 비축유가 버티는 시간이 외교의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가 위기의 성격 전체를 바꾼다.
비축이 두텁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비축이 얇다면 불리한 조건에서도 빨리 결론을 내야 한다.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 비축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회원국에 순수입량 기준 최소 90일분의 비축을 권고하는 것은, 90일이라는 시간이
통상적 에너지 위기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기에 충분하다는 경험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1973년 오일 쇼크에서 아랍 산유국의 금수 조치가 풀리는 데 걸린 시간이 6개월이었다. 그 경험이 90일
기준을 만들었다. 그러나 90일은 최소 기준이다.
위기가 90일을 넘어서면 그 이후는 산술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 된다.
어디에서 에너지를 구할 것인가. 그 선택이 곧 블록의 선택이 된다.
그 90일 기준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2026년의 일본이 보여준다.
일본은 IEA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두터운 비축 체계를 갖춰온 나라다. 1973년 오일 쇼크의 충격이
일본에게 가장 컸기 때문이다.
자원이 전혀 나지 않는 섬나라가 에너지 없이 하루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현실을 일본은 50년 전에 이미
가장 혹독하게 체감했다. 그 체감이 세계 최고 수준의 비축 시스템을 만들었다.
2025년 말 기준 일본의 비축 구조는 정부 보유 146일분, 민간 의무 비축 101일분, 산유국과의 공동 비축
7일분으로 구성된다. 합산 254일분이다.
호르무즈 봉쇄가 선언된 지 두 달이 넘도록 일본이 상대적 여유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적 이유다.
비축이 외교의 시간을 샀다.
한국의 비축 구조도 IEA 권고 기준을 크게 웃돈다.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9개 비축기지에 2025년 말 기준 공동비축물량을 제외하고 약 1억 배럴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하루 평균 원유 소비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28일분에 해당하는 정부 전략비축유다. 여기에 정유사와 민간의 의무 비축분을 합산하면, 2026년 3월 산업통상부 차관이 공식 브리핑에서 발표한 대로 200일 이상의 대응 여력이 된다.
IEA 회원국 중 비축 지속 일수 세계 6위 수준이다.
한국이 봉쇄 초기에 단기 대응 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이 숫자다.
▸ 한국 정부 전략비축유: 약 1억 배럴, 약 128일분 (한국석유공사, 2025년 12월 말 기준)
▸ 한국 정부·민간 합산 비축: 200일 이상 (산업통상부 공식 발표, 2026년 3월)
▸ 한국 IEA 비축 지속 일수 순위: 세계 6위 (한국석유공사, 2025년 9월 기준)
▸ 일본 비축 구조: 정부 146일분 + 민간 의무 101일분 + 공동 7일분 = 총 254일분 (일본 경제산업성, 2025년 12월 말 기준)
그러나 비축유는 시작의 여유일 뿐이다. 봉쇄가 길어지면 비축은 줄어든다. 그리고 줄어드는 속도는 경제
규모에 비례한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 약 94퍼센트의 나라다. 원유 수입의 약 61퍼센트가 호르무즈를 경유한다.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는 약 54퍼센트가 호르무즈를 통과해 들어온다. 나프타가 끊기면
울산과 여수의 석유화학 단지가 먼저 멈춘다.
플라스틱이 멈추고, 합성섬유가 멈추고,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화학 소재들이 연쇄적으로 위기에 처한다.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만의 위기가 아니다. 에너지가 원자재인 모든 산업의 위기가 된다. 한국처럼 제조업
기반의 수출 경제가 그 충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다.
대구의 한 중견 화학소재 납품업체 사장은 2026년 3월 초, 원자재 조달 담당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프타 입고가 다음 달부터 불확실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즉시 재고를 확인했다. 3주치가 있었다. 납품처에 연락했다.
다들 비슷한 상황이었다. 생산 일정을 조정하고 비용을 낮추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호르무즈 해협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자신의 공장이 그 해협과 연결돼 있다는 것은
알게 됐다. 에너지의 지리학은 추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구의 한 공장 가동률 표에 숫자로 찍혀 있었다.
그 연결의 비용이 전국 단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GS칼텍스는 2026년 3월 VLCC(초대형 유조선) 용선료로 하루 44만 달러를 지불했다.
S-Oil은 하루 55만 5천 달러였다. 둘 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평시 용선료의 3~4배에 해당한다.
원유를 사는 비용보다 원유를 운반하는 비용이 폭등하는 상황, 공급망의 비용 구조가 뒤집히는 것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3월을 기점으로 가동률을 최대 50퍼센트까지 낮추기 시작했다. 정부는 30년 만에
유가 상한제를 도입했다. 공무원 차량 운행 제한도 실시됐다. 에너지의 지리학이 정책의 언어로 번역되는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
▸ 한국 GS칼텍스 VLCC 용선료: 일 44만 달러 (2026년 3월, 역대 최고 수준)
▸ 한국 S-Oil VLCC 용선료: 일 55만 5천 달러 (2026년 3월, 역대 최고)
▸ 한국 석유화학 가동률 감축: 최대 50% (2026년 3월, 주요 석유화학사)
▸ 한국 원유 수입 호르무즈 경유 비중: 약 61% (한국에너지공단, 2026년)
▸ 한국 나프타 수입 호르무즈 경유 비중: 약 54% (산업통상부, 2026년)
비축유가 시간을 사준다면, 그 시간 안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움직인 방식이 그것을 보여준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오만,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를 긴급 순방했다.
에너지 안보를 위한 외교 자산을 총동원하는 행보였다. 그 결과 2026년 4월과 5월분 원유 약 1억 1천만
배럴을 선제적으로 확보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단했던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도
재개했다.
2026년 3월, 러시아산 나프타 2만 7천 톤이 한국에 처음으로 다시 들어왔다. 4년 만의 일이었다.
러시아산 나프타의 재수입은 단순한 원자재 조달이 아니었다. 외교적 신호이기도 했다.
서방 제재 구도 안에서 러시아산 원자재를 다시 들여온다는 것은 에너지 안보와 동맹 규범 사이의 경계를
걸어가는 행위다. 한국은 그 경계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걸었다.
인도의 외무장관 자이샨카르가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를 사면서 인도에게 러시아산 원유를 사지 말라고 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논리였다.
에너지 안보 앞에서 규범의 언어는 현실의 압력에 자리를 내준다. 그것은 특정 나라의 특수한 선택이 아니다. 에너지의 지리학이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반응이다.
에너지의 지리학이 만드는 압력은 모든 나라에 동일하지 않다.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순수출국이 됐다. 2024년 기준 하루 약 1,320만 배럴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다. 호르무즈가 닫혀도 미국의 에너지 공급에는 직접적 영향이 없다.
반면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약 61퍼센트다. 일본은 중동 의존도가 90퍼센트를 넘는다. 중국도 45퍼센트 이상을 중동에서 조달한다. 같은 봉쇄가 나라마다 전혀 다른 압력으로 작동한다. 그 차이가 호르무즈 위기에서 각국의 외교적 선택을 갈랐다.
미국이 항모를 보내면서도 지상군 투입은 배제한 이유, 중국이 이란과의 외교 채널을 즉각 가동한 이유,
한국이 중동·중앙아시아 긴급 순방에 나선 이유.
모두 같은 지리적 구조에서 나온 다른 선택들이다.
미국 유권자의 47퍼센트가 호르무즈에 해군을 파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가 2026년 4월에 나왔다. 1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미국이 에너지 자립을 달성한 순간, 세계 경찰 역할의 경제적 동기 하나가 사라졌다. 분명히 호르무즈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에너지 이익을 지키는 것이던 시절이 있었다. 페트로달러 체제 아래에서 중동 원유가
달러로만 거래되고 그 달러가 미국 국채로 순환되던 구조에서는 호르무즈의 안정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었다.
그러나 이제 호르무즈를 지키는 것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됐다. 미국 납세자
입장에서 왜 내 세금으로 중국의 석유 수송로를 지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현실이 됐다. 그 변화가
에너지의 지리학이 만들어낸 동맹 구조의 균열이다.
여기에 반론이 있다. 한국의 에너지 의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이고, 세계 6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배터리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K-방산의 수출이 급증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 수주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 나라가 39킬로미터 해협 하나에 이렇게 취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닌가.
또한 이번에 보여준 한국의 위기 대응도 비교적 빠르고 체계적이었다.
이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국력은 실질적이다. 그 국력이 위기 관리 역량의 차이를 만들었다.
비축 체계가 두텁고, 외교 자산이 충분하고, 대응 속도가 빠른 것은 한국의 구조적 강점이다.
그러나 이 반론에는 핵심적 오류가 있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에너지 의존이라는 지리적 조건 자체를 제거하지 못한다.
조건을 더 잘 관리할 수 있게 할 뿐이다.
국토에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떤 GDP로도, 어떤 무기로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지리의 문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썼다.
확실한 것에서 출발하라. 한국이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사실을 부정하는 전략은 전략이 아니다.
한국의 해군 전력 운용에서도 이 구조적 제약은 명확하게 작동한다. 인도양과 아라비아해 일대에
독자적으로 해군력을 투사하여 에너지 수송로를 보호하는 것은 전략적 제약이 명확한 선택지다.
만일 물리적으로 전력을 보낼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분쟁 지역에 대한 적극적 군사 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어
외교적 비용이 너무 크다. 결국 에너지 수송로 보호는 미국 해군에 의존하는 구조인데 그 미국 해군의
파견 여부가 이제 미국 국내 여론과 정치의 변수가 된 것이다.
한국의 전략적 제약이 거기서 온다.
세계 6위 군사력이 허상이어서가 아니다. 에너지 수송로 보호라는 특정 임무에서 독자 행동의 선택지가
구조적으로 좁다는 것이다.
그것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지정학적 조건이 만들어내는 전략적 한계다.
▸ 한국 에너지 수입 의존도: 약 94% (에너지경제연구원, 2025)
▸ 강훈식 비서실장 긴급 순방: 오만·카자흐스탄·사우디아라비아 (2026년 3월)
▸ 4~5월분 원유 선제 확보: 약 1억 1천만 배럴 (산업통상부, 2026년)
▸ 러시아산 나프타 재수입: 2만 7천 톤, 2022년 이후 최초 (2026년 3월)
▸ 미국 원유 생산: 하루 약 1,320만 배럴, 세계 최대 산유국 (EIA, 2024)
그 한계를 인식한 위에서 한국이 택한 전략이 다변화다. 비축을 200일 이상으로 유지하고, 외교 자산으로
대안 공급처를 발굴하고, 에너지 전환을 가속해 중동 의존 자체를 줄이는 방향. 세 개의 축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전략이다.
강훈식 비서실장의 긴급 순방, 러시아산 나프타의 전략적 재수입, 재생에너지 투자 가속. 이 세 가지는
분리된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적 응답이다.
에너지의 지리학이 강요하는 조건 앞에서 조건을 관리하는 것이 나라의 국력이다.
세계 10위권 경제와 세계 6위 군사력이 그 선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선택의 폭을 넓혀줄 뿐, 선택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는다.
지리는 여전히 거기 있다.
에너지를 쥔 나라의 협상력이 거기서 온다. 이란이 세계 에너지 시장을 인질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다. 페르시아만의 지질 때문이다.
중동의 원유가 그 지층에 묻혀 있고, 그 원유가 호르무즈를 통과해야 하고, 그 호르무즈의 북쪽 해안이
이란 영토다.
세 개의 지리적 사실이 하나의 정치적 무기를 만든다. 이것이 에너지의 지리학이다.
지질이 지정학을 결정하고, 지정학이 에너지 가격을 결정하고, 에너지 가격이 세계 경제의 구조를 바꾼다.
그 연쇄가 1973년 쿠웨이트시티의 회의실에서 처음 가시화됐고, 2026년 호르무즈에서 가장 정밀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에너지는 인류가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믿음 중 하나다.
달러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달러를 믿기 때문이듯 석유가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모든 나라가
석유 없이 현대 경제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유된 취약성이 이란의 협박을
실질적인 것으로 만든다.
에너지의 지리학은 지질학이면서 동시에 심리학이다.
이란이 호르무즈를 닫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세계는 이미 멈추기 시작한다.
실제로 배가 막히기 전에 선물 시장이 먼저 반응하고, 보험료가 먼저 올라가고, 계약이 먼저 중단된다.
공포가 현실보다 빠르다. 그 공포가 에너지의 지리학이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구조가 바뀌기 전에 위기가 먼저 온다. 그 위기가 구조를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에너지의 지리학이 가장 극적으로 작동한 사례가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다.
30년에 걸쳐 구축된 에너지 의존이, 하루 만에 정치적 문제가 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러시아-유럽: 30년의 의존, 그리고 붕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됐다. 동독과 서독이 하나의 나라가 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1개월 만이었다.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독일의 산업계와 정치계는 다음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통일 독일의 에너지를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 동독이 소련의 에너지 공급 체계에 묶여 있었고, 서독도 이미 1970년대부터 소련 가스를 수입하고 있었다. 두 독일을 하나로 합친 에너지
수요는 방대했다. 그리고 동쪽에는 세계 최대의 가스전이 있었다.
1992년, 독일 가스 기업 루르가스와 러시아 가스프롬 사이에 장기 공급 계약이 체결됐다. 조건은 단순했다. 러시아는 가스를 공급한다. 독일은 파이프라인 건설과 운용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제공한다.
러시아가 필요한 것은 돈과 기술이었고 독일이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에너지였다.
두 나라의 필요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비교우위론의 교과서적 사례였다.
러시아는 가스를 잘 만들고, 독일은 산업을 잘 돌린다. 교환하면 둘 다 이익이다.
그 계약이 씨앗이었다. 이후 30년에 걸쳐 파이프라인이 깔리고, 터미널이 건설되고, 가스 화력발전소가
세워졌다. 인프라가 하나 완성될 때마다 의존이 깊어졌다.
의존이 깊어질수록 파이프라인을 끊는 것의 비용이 커졌다. 비용이 클수록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것이 인프라 의존의 특성이다. 한번 깔리면 돌이키기가 어렵다. 파이프라인은 물건이 아니다. 파이프라인은 관계다. 그 관계가 30년 동안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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