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데미안, 파우스트
나는 열두 살에 아빠의 서재에 꽂혀 있던 세 권의 책을 꺼내 읽었다.
제목과 금박의 무늬로 된 양장본, 별다른 삽화도 거의 없는 어른의 책.(어린 왕자는 제외^^)
어린 왕자, 데미안, 파우스트.
그 책들을 골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권유도, 설명도, 안내도 없었다. 다만 제목이 그때의 나를 가만히 건드렸다.
"어린"이라는 말보다 "왕자"라는 단어가 먼저 다가왔고,
이름 하나로 서 있는 "데미안"이 궁금했고,
"파우스트라"는 낯선 음절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그 책들이 어떤 책인지 알지 못한 채 읽었다.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순서를 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감수성이 먼저 반응했고, 나는 그 반응을 따라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열두 살의 나에게 어린 왕자는 관계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일, 책임을 진다는 것, 사랑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
어린 왕자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여우는 이렇게 관계해야 한다는 기준을 아주 조용히 남겼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람을 쉽게 대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계를 가볍게 맺지 못하게 되었다.
한 번 마음을 준다는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 이르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어린 왕자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나온 세계가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의 기준점인 북극성으로 남아 있다.
데미안은 어린 나에게 철학적 낭만이었고, 무엇보다 닮고 싶은 존재였다.
데미안은 늘 말했다.
너 자신이 되라고.
그 말은 그때의 나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선언처럼 들렸다.
어딘가에 진짜 내가 숨겨져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으리라는 아름다운 믿음.
그래서 나는 데미안을 이해하려 했던 게 아니라 닮고 싶어 했다.
흔들리지 않는 태도,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는 가능성,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으로 묶인 완전함 같은 것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데미안도, 아브락사스도 아닌
싱클레어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었다.
망설이고, 흔들리고, 선과 악 사이에서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버티며 건너온 시간들.
‘자기 자신이 돼라’는 말은 그 시간 속에서 위로가 아니라 질문이 되었고,
가능성이 아니라 책임이 되었다.
파우스트는 하나의 무서운 실험 같았다.
어디까지 얼마나 욕심을 내도 되는지, 선택은 무엇을 잃게 만드는지,
나는 과연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질문들을 나는 오래도록 들고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파우스트는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처절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파우스트는 비극도, 경고도 아닌 하나의 희곡처럼 남아 있다.
이미 통과한 질문은 조용해진다.
그리고 결국 다시 데미안이 남는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이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 데미안을 다시 읽는 것이 두렵다.
열두 살의 나에게 “자기 자신이 돼라”는 말은 낭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문장은 더 이상 낭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선택을 했고, 이미 너무 많은 책임을 살아냈고,
이제는 스스로에게 “나는 정말 나였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데미안은 나를 이끌어줄 존재가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와버렸는지를
확인하게 만드는 책이다.
두려운 것은 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 앞에 서게 될
싱클레어로 살아온 나 자신이다.
데미안은 모순을 해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을 통합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모순인 채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버린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나에게 지나치게 정확해서 두렵다.
나는 여전히 어린 왕자를 붙잡고 살고,
파우스트를 지나왔으며, 데미안을 두려움 속에 남겨둔 채 살아간다.
이건 미완도 아니고 회피도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정직한 위치다.
어떤 책은 다시 읽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서 계속 쓰이고 있다.
그리고 열두 살의 내가 열어둔 세 권 중 아직 닫지 못한 책,
"데미안"을 가슴 안에 남겨둔 채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