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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Oct 08. 2024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에요

To. 대구


정말 오랜만에 작가님의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답장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눈 뜨면 일주일이 지나가고, 눈을 돌리면 한 달이 물러나 있고, 정신을 좀 차리면 계절이 바뀌어 있습니다. 분명히 뜨거운 여름 햇살에 몸을 태우며 편지를 썼던 것 같은데 지금 저는 발목을 덮는 레깅스에 깔깔이 잠바를 입었답니다.


작가님의 제주도 일상은 글을 통해 잘 드려다 보았어요. 틈만 나면 바닷가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작가님의 아이들과 물놀이를 한 기분이었답니다. 제 아이들은 이제 물놀이보다는 핸드폰을 더 좋아하는 청소년이 되었어요. 여름휴가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남쪽 바다에서 날마다 몸을 담글 생각이었는데, 여러 날 중에 딱 하루만 바닷가에 몸을 담글 수 있었어요. 저희 첫째 아이는 그마저도 싫다며 수영복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벤치에 앉아서 축구게임을 했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이렇게 사그라드는 게 조금 슬프면서도 말이 통하는 한 인격체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슬픔과 감격을 동시에 선물하는 것 같아요.


전 요즘 '소피의 세계'를 읽고 있어요. 노르웨이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로 소피와 알베르토 크녹스라는 아저씨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해 나누는 서간문이자 철학입문서이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신 작가님은 이미 읽어보셨겠죠?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은 책이지만, 저희 같은 어른이 읽어도 꽤 좋은 책 같아요.

지난주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부분을 읽었습니다. 역시나 철학적 문장은 좀 어려웠어요. 이런 책이 청소년필독서라니, 청소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했어요.

여러 어려운 문장 중에 지금 제 상황과 딱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감각 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은 무엇이든 간에 시간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야. 너도 알다시피 다소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과 동물은 결국 분해되고 죽게 되니까. 심지어 대리석 덩어리도 아주 천천히 닳아서 결국은 완전히 부스러져 버리지."
<소피의 세계, 요슈타인 가아더>


불확실한 오감을 통해 인식하는 "감각 세계"와 우리 인간이 인식할 수는 없지만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알베르토 크녹스 씨가 소피에게 설명하는 내용 중 일부분이에요. 제가 요즘 점점 노화되는 몸의 변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에 더욱 공감했던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제 몸은 갱년기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사십 대 중반이 되기도 했고, 작년 여름에 자궁적출수술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갱년기가 시작되었지요.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주먹을 꽉 쥐지 못하게 된 건 6개월이 넘었습니다. 관절에 좋다는 약을 사서 먹고,  통증을 덜어준다는 크림을 사다 바르고 있어요. 이런저런 약보다 가장 효과가  좋은 건 남편이 '정성스럽게' 제 손가락을 주물러 주는 것인데요, 매번 '정성'이 담기는 것은 아니기에 효과는 그때그때 다르답니다.

지난주에는 집에서 쉽게 측정할 수 있는 혈당기계를 하나 샀어요. 두 달 전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무릎이 까졌는데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더라고요. 약을 사다 바르고, 상처치유밴드를 사다 붙이고, 이런저런 애를 썼는데도 상처에 딱지가 생기질 않더군요. 그때 제 몸에 제가 모르는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했습니다. 혈당이  높을 때(특히 당뇨 환자들에게) 상처가 잘 아물지 않거든요.


기계를 산 후 매일 아침 공복에 혈당체크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높게 나온 수치에 충격을 먹었습니다. 가족들 입히고, 먹이는 일은 열심히  했으면서도 내 몸을 돌보는 일엔 소홀히 했다는 걸, 아니 그냥 무시하며 살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우리의 몸이 닳아서 부스러지고 언젠간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사는 동안엔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탄수화물 중독자였던 저는 탄수화물을 끊었어요. 라면도, 기름진 음식도 끊었고요. 한잔씩 마시던 맥주나 와인도 줄였습니다. (완전히 끊기가 왜 이리 어려울까요?) 저녁을 먹지 않는 대신 우유에 뽕잎을 타서 먹고요, 유산균과 비타민을 꼬박꼬박 먹기 시작했어요.


며칠 전에는 아침을 거르고 교회에 갔다가 저혈당증상이 왔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손이 떨렸지요. 바로 설탕물을 마셔서 좋아지긴 했지만, 내 몸의 혈당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라는 걸 다시 한번 알았어요.

 

혈당 조절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성호르몬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간이 당을 분해할 때 관여하는 것이 바로 여성호르몬인데요, 갱년기가 되어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 혈당분해를 잘 못하게 되는 것이죠.

자궁도, 여성호르몬도 참 하찮게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저런 건강문제와 마주하니, 저를 여자로 살게 해 준 것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혈당이 떨어지지 않아 낙심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아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너무 스윗한 여자인가 봐."

아이의 이 말에 우울해지려던 제 마음이 한 번에 밝아졌어요.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랐나.... 한번 더 슬프다가도 기뻤답니다.

참, 시간이란 아이러니하죠.



지금 밀라노는 비가 옵니다. 가을의 밀라노를 저는 참 좋아해요. 비가 오는 밀라노도 정말 예쁘답니다. 이 가을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겠죠. 마음의 여유를 위해선 몸의 건강도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떤 가을을 보내고 계신가요?

곧 출간될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 준비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계신가요?

다시 돌아온 일상을 살아내는 작가님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제주의 바다를 잊지 못하는 작가님의 글을 보며,

저의 미래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저에겐 여기 밀라노가 그럴 것이니까요.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작가님은 한 달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고, 저에겐 밀라노에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겠죠. 기한이 없이 산다는 것은 마치 "내가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며 살까?" 하는 마음과 비슷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두렵지 않네요. 지금껏 그랬듯, 저는 또 언제 어디로 가더라도 잘 살아낼 거라는 걸 믿기 때문인가 봐요.

지금은 여기, 밀라노에서 하루하루를 마음에 담아보겠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오늘은 꼭 써야지… 했다가 한 줄도 못 쓰고 내일로 미룹니다. 하지만 정작 내일이 되어도 또 쓰지 못합니다.


”왜 쓰려고 하는가? “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있을까 싶어요.

아예 글쓰기를 그만둘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작가님의 안부를 묻고 싶어서 매일 한 줄씩 쓴 편지를 띄웁니다.



from.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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