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배우는 이탈리아어 수업
아들아이가 유튜브로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나를 찾았다.
“엄마, 엄마! 이 사람 좀 바봐.”
“왜? 뭔데?”
아들이 내민 영상에는 20대로 보이는 흑인 남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왜?”
“한국 말을 엄청 잘해. 우간다 출신인데 한국에 산대. 근데 너무 웃겨.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 같아.”
화면 속 그 남자는 경상도 사투리로 한국인 아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헤이, 허니. 오늘 뭐 타고 왔어?”
“나 오늘 BMW 타고 왔다. 버스, 메트로, 워킹. 나 진~짜 피곤하다. 1시간 넘게 걸렸다 아이가. 건드리지 마라, 진짜!”
그의 말에 그의 아내는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사자성어에 속담, 최신 유행하는 한국어까지 두루 사용하면서 농담과 진담을 넘나드는 그를 보고 있으니 재밌는 것도 잠시,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왔다. 밀라노에 산지 4년 차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기본적인 인사말 외에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이어갈 능력이 현저히 낮은 내 이탈리아어 수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어습득 능력은 나이와 반비례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며 지금이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이고 새로운 언어를 습득할 최적의 나이라고 되뇌인다.
‘이탈리아에 평생 살 것도 아닌데, 그냥 기본적인 말만 하면서 대충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더욱이 이탈리아어는 다른 나라에서 써먹을 수도 없는데…. 그 시간에 영어 공부를 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너무나도 합당한 포기 해도 괜찮은 이유들이 떠오른다. 몇 번의 도전과 몇 번의 포기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해야만 하는 상황에 나를 밀어 넣는 것”이었다. 네팔 현지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해야 했기에 죽기 살기로 네팔어 공부를 했던 것처럼, 방글라데시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살아남아야 했기에 아이들을 재우고 벵골어를 공부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했기에 6개월 동안 하루 종일 영어공부를 했던 것처럼.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은 절실함이거나 이불을 박차고 집밖으로 뛰쳐나가 자유를 누릴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현지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함께 배우는 일이다. 입과 입이 만나 말이 되고, 말이 손을 만나 글자가 되었다. 글자가 한 나라의 언어가 되기 위해선 그 나라의 문화가 필요하다. 글자와 언어와 문화가 하나로 연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처음 배운 이탈리아어는 부온죠르노와 부온 포메리죠, 부오나세라, 그리고 챠오와 살베 등의 인사말이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온라인 수업 초급 이탈리아어 과정에 과감하게 등록했다. 초급부터 차근히 배우면 언젠간 중급이 되겠지, 중급까지 계속 수업을 들으면 말이 틔이고, 귀가 열리겠지. 네팔어처럼, 벵골어처럼.
착각이었다. 인사말은 그저 인사말일 뿐, 조금 더 친해지기 위한 안부와 친구가 되기 위한 정보를 공유하는 말을 나는 전혀 하지 못했고,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탈리아 친구를 만들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등록한 곳이 바로 꼬무네 초급 이탈리아어 코스이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 등록한 이곳에서 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숙제를 하고, 공부하는 나를 만난다. 마흔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학창 시절의 나를 마주하는 일은 부끄럽고, 안쓰럽고, 기특하고, 애틋하다.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그전엔 전혀 알지 못했던 단어 하나, 동사 하나를 배울 때마다 단단하게 덧씌워져 있던 알에 조금씩 금이 간다. 그 알이 완전히 깨져서 깨어날 때 나는 드디어 진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 중년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고, 습득의 시간은 더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