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밀라노에 집을 구했다.
그동안 거친 열다섯 개의 공간을 모두 쓰고 싶었지만, 모두 담지 못했다.
대신 짧은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1월에 한국으로 갔다가 4월에 밀라노로 다시 왔다. 금방 집을 구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숙소를 다섯 번 더 옮겨야 했다. 그 와중에 딸아이는 가슴에 넓은 화상을 입어 병원에 다녔다. 나는 아나필락시스 (급성 전신 알레르기 반응)로 응급실에 가서 급하게 치료를 받았다. 밀라노에서 열리는 가구 박람회 때문에 밀라노 시내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밀라노 외곽의 몬차라는 지역에서 일주일 지내기도 했고, 예약한 숙소에 갔더니 발코니 공사를 하고 있어서 집주인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숙소를 나가야 하는 날과 새로 구한 집에 들어가는 날짜가 어긋나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행이나 가자며 베로나로 가서 아이다 오페라를 보았다.
매번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그때마다 좌절했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런데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든 여정을 글로 기록했다. 개인 매거진을 매주 발행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글을 썼다. 그 와중에 글쓰기 모임을 하고, 북클럽 모임을 했다. 집 없이 살았던 지난 1년 동안, 나는 가장 많은 글을 썼고, 가장 많은 활동을 했다.
"그 후 나는 아흐레 동안 바다 위를 떠다녔으며 열흘째 되는 날 밤 신들은 나를 오기기아 섬에 닿게 해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목소리는 인간 같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머리를 곱게 땋은 칼립소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떠돌다 칼립소의 섬에 이르게 되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고 보내주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풍요롭게 지냈으나 날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불사신으로 만들어 줄 테니 영원히 함께 살자고 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불사신으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한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밀라노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 같다.
사람들은 밀라노에 사는 우리를 부러워한다. 여행자처럼 사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물성에 대한 집착도, 내 집에 대한 부담도 없이 사는 우리가 대단하다며 치켜세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 단면일 뿐이다. 고민할 게 없는 섬에서 지냈던 오디세우스가 날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듯이, 우리도 언제나 돌아갈 곳을 생각하며 고민을 지우지 못한다.
며칠 전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시골로 가든 지방으로 가든. 어디든 가자고 했다. 그는 정말로 곧 들어갈 것처럼 이야기했다.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을 다시 한번 헤아려보았다. 어느 곳에 가서 살아야 집값이 싼 지 검색도 해보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그의 마음은 다시 바뀌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 온 이상 뭐라도 일을 제대로 해 놓고 가고 싶다고....
어쩌다 밀라노에 왔지만, 우리의 의지로는 나갈 수 없는 곳, 밀라노는 그런 곳이 되었다.
오디세우스를 보내주지 않았던 칼립소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라는 제우스의 전령을 가지고 온 헤르메스의 방문 후에 오디세우스를 보내준다.
우리도 신이 허락하실 때 비로소 밀라노를 떠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모두 행복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을 안고 산다. 그 불행의 조각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자 할 뿐.
"난 이제 오늘만 살 거야. 현실에 충실 거야.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을 거야. 미리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그때그때 어려움이 닥치면 헤쳐 가는 거지."
나는 홍 군에게 내 삶의 모토를 진지하게 전했다.
우리의 밀라노 오디세이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고향집 이타케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또 다른 시련을 만났듯, 하지만 그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만났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듯.
우리의 오디세이아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마저 쓰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쓸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