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리는 모두 자궁에서 태어났다.

에필로그

by 선량

한국에서 한 달 반을 보내고 밀라노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한 달만 한국에서 보내고 밀라노로 돌아와 이탈리아 여행을 할 계획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자궁수술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집안 곳곳엔 남자 혼자 지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변기 안쪽의 떼라던지, 천장 모서리 부분의 거미줄이라던지, 주방 싱크대에 눌어붙어있는 음식물 찌꺼기라던지....

이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시차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했다. 탈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서부터 끌고 온 캐리어 네 개를 모두 펼쳐 짐 정리도 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도 내 집이 아니고, 여기도 내 집이 아니면 도대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순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침대에 누워있던 큰아이가 코를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전날 밤에는 둘째 아이가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집안의 여러 일로 어른들이 분주하고 힘들 때 아이들은 그저 즐겁게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너무 좋았던 기억은 아쉬움도 큰 법. 그 아쉬움이 눈물이 되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즐거운 이유는 잠시 휴가로 갔기 때문이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이미 인생 네 컷과 탕후루와 만화카페와 마라탕을 경험한 아이들은 한국의 달콤함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우울해하는 아이들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넸다.

그건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차곡차곡 기록해 놓은 육아 일기였다. 점 하나 찍혀있는 첫 초음파 사진부터 콩알 같은 사진을 거쳐 개구리 같은 사진을 지나 드디어 사람의 형상을 한 사진까지. 아이를 낳고 키우며 폴라로이드로 찍어 붙여둔 사진과 힘들 때마다 하소연하듯 써 놓은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노트였다.

아이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듯 아주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지안아, 여기가 바로 엄마의 자궁이야. 지금은 수술해서 없지만, 네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엄마의 자궁이란다."

"근데 엄마, 이건 그냥 점인데?"

"그렇지? 신기하지? 이 점이 점점 자라서 사람의 모습이 되는 거야."

"너무 신기한데?"

"나중에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이 노트를 펼쳐 봐. 그러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될 거야. 단지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네가 이렇게 생겼고, 엄마의 자궁에서 이렇게 자랐고, 세상에 태어난 거지. 너무 경이롭지 않니? 그러면 또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길 거야."

"응, 알았어 엄마."


아이들과 투닥이며 하루 일과를 보낼 때 위암 수술을 한 남편보다 자궁 수술을 한 딸을 더 걱정하는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도착했니? 몸은 어때? 괜찮니? 비행기에서 별일 없었고?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

나는 엄마에게 웃긴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

"암시랑토 안 해~~~"


비록 엄마와의 물리적 거리는 너무 멀지만, 나를 염려하며 기도해 주는 엄마의 마음은 내 곁에 있으니,

그곳이 바로 '집'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우리는 모두 자궁에서 태어났다.

자궁은 우리의 최초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집을 가지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우리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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