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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코스모스는 어디인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코스모스 & 아빠가 우주를 보여준 날

by 선량

며칠 전, 아는 분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뒷좌석엔 이제 막 유치원에서 하교한 그분의 두 아이가 카시트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아, 엄마가 너 주려고 선물 사 왔어. 카시트 옆에 있어. 한번 찾아봐."

"와, 정말? 엄마 뭐야? 뭐야?"

아이는 부산하게 카시트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가 미리 준비한 선물을 찾았다.

"우와! 멋지다~~"

아이의 손엔 구슬만큼 작은 행성 7개와 태양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들려있었다.

"우리 정이, 태양계 좋아하는구나? 우와, 멋지다~"

이제 5살인 아이는 지구며 목성이며 화성이며 금성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엄마. 이렇게 빨간 행성은 뭐지? 화성인가?"

"응 그런 것 같아."

"엄마 그런데 해왕성에 왜 고리가 없지?"

"그래? 제일 마지막에 있는 게 해왕성 같은데?"

"제일 큰 건 목성이지?"

"응, 맞아."

"우와, 정이 정말 똑똑한데?"


한참 우주와 태양계를 좋아한다는 아이는 엄마의 깜짝 선물에 흡족한 것 같았고,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한 정이의 동생은, "엄마 나는? 엄마 내 거는? 나도 똑같은 거 사죠~~"하며 아우성을 쳤다.

그 두 아이를 보고 있자니, 이제 어린아이 티를 완전히 벗은 우리 집 큰아들이 떠올랐다. 우리 집 아이도 5살 무렵엔 우주를 좋아하고, 태양계의 특성을 줄줄이 외웠었는데. 태양계를 직접 그리고 오려서 집 벽에 붙여 두어었는데. 우주선을 직접 그려서 상상의 우주여행을 떠나곤 했었는데....

그런데 이 아이들은 정말 우주를 이해하는 것일까? 태양계의 행성과 저 태양계를 품고 있는 은하를 이해하는 것일까?

지금은 우주는커녕 좁은 자기 방에 들어앉아 휴대폰 속의 브롤스타즈 세상에서 온갖 아이템을 장착하고 적을 물리치느라 바쁜 아들을 보니, 사람의 나이와 우주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작년 11월부터 읽기 시작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책을 3개월에 걸쳐 슬로리딩 했다. 이런 벽돌책을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재승 교수님의 <열두 발자국> 책을 읽은 후 코스모스 책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갈 책"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말은 코스모스를 읽도록 더욱 부추겼다. 도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길래? 결국 총 682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9명의 멤버들과 함께 읽기 시작했다.

<코스모스>가 책으로 나오기 이전엔 13 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였다. 천문학을 다루지만 인간을 폭넓은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일반 시청자의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겨냥하면서 귀와 눈에 하나의 충격을 줄 수 있는 기획물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그 시리즈는 성공을 거두었다. 1억 4천 명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것은 지구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참고: 코스모스, 24p]



<코스모스> 책은 방송으로 미처 내보내지 못한 내용과 문제를 더 깊고 방대하게 다루고 있다. 즉, 우주라는 천문과학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수학, 생명과학, 우주과학, 지질학, 기하학, 수학, 유전자학, 미래공학, 인문학까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지식과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이건 뭔 소리?"를 외치며 나의 무식함을 낫낫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심지어 학교에서 조차 배우지 않은) 수많은 과학자, 지질학자, 수학자, 역사학자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책의 상당 분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삶은 코스모스를 읽기 전후로 나뉜다."



코스모스 cosmos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며 카우스에 대응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로 피타고라스이며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천체"라고 생각했다. 즉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주어진 생을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참고 : 코스모스, 363p]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스모스, 칼세이건, 675p]




우주에 관한 방대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의 결론은 외계인도 아니고, 저 너머의 다른 행성도 아니고 블랙혹이나 웜홀의 존재 유무도 아니었다. 바로 이 지구와 인류에 대한 사랑과 감사였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682p]





코스모스를 읽기 전 나의 우주는 책 속에 존재했다. 아니,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 너머의 것, 인터스텔라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미지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내 옆,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공간이 바로 우주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저 멀리서 바라보며 조망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이고, 내 주위를 맴도는 사람은 위성이며 나와 밀접하게 관계하며 내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밝은 빛을 발하며 떨어진 유성이다. sns에서 멋지게 보이는 사람들은 저 하늘에서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지나가가는 밤하늘의 유성우와 같다.


사람과 별을 연결시켜 생각하다 보면 아이들이 어릴 적에 읽어 주었던 그림책 <아빠가 우주를 보여준 날>이 떠오른다.

이 그림책은 어느 날 밤, 아빠가 아이에게 우주를 보여주기 위해 함께 집 밖으로 나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가는 길에 껌을 하나 사고, 들판을 가로질러, 개울을 건넌 후 별이 총총이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빠는 네가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하늘만 쳐다보다 개똥을 밟은 아빠를 보며 아이는 웃음을 짓는다.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을 바라보며 아빠가 보여주겠다는 우주를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빠의 이 말은 아이의 마음에 박혔다. 아이에게 우주는 아름답고, 정다우며, 즐거운 것이었다. 이 아이에게 우주는 손이 닿지 않는 멀고도 먼 미지의 장소가 아니었다. 아빠와 함께 걸었던 거리와, 껌을 사기 위해 들렀던 가게, 아빠의 입에서 나온 휘파람 소리와 들판을 가로지르며 맡았던 냄새, 바람, 개울가에 비친 하늘....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우주였다.




나의 우주, 나의 코스모스는 어디일까?

작게는 내 생각과 마음을 담고 있는 육체일 것이고, 나의 가족일 것이며,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우주는 모두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자전하고 공전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받는다.

내 작은 우주부터 내가 살고 있는 푸른 지구의 우주를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책을 읽으며 좋은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눈다.



나 한 사람이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제대로 살아갈 때 나를 둘러싼 수많은 별들도 자신만의 빛을 반짝이며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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