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난에 반전이 있었으면 좋겠다[가난한사람들, 구의증명]

도스토예가난한 사람들, 구의 증명

by 선량

청소년 시절, 방 두 칸짜리 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다섯 남매가 함께 살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한 달에 한번 트럭에 쌀이며 물을 잔뜩 실어 왔다. 아빠는 시골의 좋은 물을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수돗물을 받아 끓여 먹어야 했던 도시에서 가스비와 물세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 건물 중 우리는 3층에 살고 있었다. 아빠가 물과 쌀을 가져오면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쌀가마니와 큰 통에 담긴 물을 3층까지 들고 올라가야 했다. 청소년기의 나는 어찌나 힘이 장사였던지, 쌀 한 가마니를 번쩍 들고 계단을 오르곤 했다.


참 가난한 시절이었다. 종이 버스 승차권을 10개씩 사지 못하고 5개씩 사서 다녔다. 당연히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고, 필요할 때마다 큰언니나 할머니에게 타다 썼다. 스무 살이 되도록 나는 광주 시내 길을 몰랐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고, 가는 길도 몰랐다. 나는 학교와 집, 집 근처 교회만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둘째 언니가 날 집 근처 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매우 투박한 신발을 하나 사주었다. 겨우 만오천 원 하는 신발을 선물 받고 나는 정말 행복했다. 언니들의 옷과 신발을 물려받아 신던 내가 오랜만에 가져보는 새 신발이었다.

참 가난했지만, 가난한 줄 모르고 살았다. 나에겐 언니들이 있었고, 언니들과 함께 있으면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을 그저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으로 그를 일약 스타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24세의 무명작가였던 도스토옙스키를 문단의 총아로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2의 고골”이라는 별명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 말미에 있는 작품해설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가 원고를 보여 준 사람들은 새벽이 되도록 작품을 읽고 난 뒤 아침 일찍 작가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두 뺨을 맞추며 축하를 보냈다고 한다.

<작품 해설 중>



소설의 내용은 꽤 단순하다. 50대의 가난한 하급관리 마르카와 불우한 고아, 바르바라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주며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가난했던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다. 부자는 계속 부자로, 빈민은 계속 빈민으로 사는 것이다.


마르카는 먼 친척 뻘인 고아 바르바라를 어떻게든 책임지려고 한다. 자신도 가난해서 당장에 방세 낼 돈도 없으면서 바르바라에게 돈을 보내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저당 잡히고, 팔아서라도 바르바라를 도와주려고 한다.

고아인 바르바라는 어떻게든 홀로 잘 살아보려 노력한다. 삯바느질을 해서 번 돈으로 곤경에 처한 마르카를 도와주고, 낙심에 빠져 술을 마시는 마르카에게 제발 정신을 차리라며 훈계한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술주정뱅이와 고아소녀의 추문으로 바라본다.

바르바라는 결국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부자 지주와 결혼을 하고 그를 따라간다.

그녀를 바라보는 마르카도 마음이 괴롭다. 하지만 그는 너무 가난해서 바르바라를 붙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결혼을 축복하며 결혼 준비를 도와준다.

​결혼을 하면 행복해야 할 바르바라는 불행하을 느낀다. 오히려 부자 남편의 눈치를 보며 끌려가는 듯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1846년 러시아에서 출간되었다. 당시 사회의 한 부분을 잘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참모습을 그려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반전 없는 가난이 지금, 여기에도 존재하는 게 참 아이러니 하다.



최진영 소설가의 작품 <구의 증명> 은 2023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여기에도 두 명의 가난한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할아버지와 살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모와 살게 된 담.

부모님과 함께 살지만 사채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다 가난을 대물림 받은 구. 이 두 사람은 가난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다 결국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시골로 들어간다. 하지만 구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곳까지 쫓아와 구를 집어삼킨다.


죽은 구를 곁에 두고 담은 구를 먹는다. 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구의 몸을 한 조각 두 조각 먹으며 담의 온몸에 구를 새긴다. 그리고 천년을 살아내어 구를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담이는 이모로부터 사랑을 충만히 받았다. 그 사랑을 아낌없이 구에게 전해준다.


“걱정되지?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

”걱정하는 마음? “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고서 이모는 말의 시작과 끝마다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천만 번은 했을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흡이 잦아들기 전에는 입 모양만으로 내게 잘 지내라고 말했다.
나는 잘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구의 증명, 최진영> 밀리의 서재



구의 증명을 읽다 처음엔 구의 몸을 먹는 담이 상상 되어 기괴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읽다 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기괴함은 이내 먹먹함으로 변했다. 담과 구 같은 상황이 현실 세계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도 여전히 가난의 반전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도, 구의 증명에도 가난의 반전은 없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가난한 마르카와 바르바라가 가난한 삶 속에서도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받는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구와 담이 가난의 굴레에서 도망치며 살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담이었지만, 이모가 남겨준 그 한마디는 사랑이었다.

담이 구의 몸을 먹으며 남기고 싶었던 것은 육체는 사라져도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 가난에도 사랑이 있었다. 비록 언니들이 맨날 싸우고, 동생이 오락실에 들락거려 매를 맞고, 밤마다 서로 벽에 붙어 자려고 싸웠지만, 언니들이 있었기에 나의 가난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덕분에 힘들었던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발목잡지 않는다.



​소설 속엔 가난의 반전이 없었지만, 가난했던 나에겐 반전이 있었다. ​​

IMF를 정통으로 맞은 99학번인 나는 취업이 가장 잘 된다는 간호학과에 입학을 했고, 졸업하자마자 병원에 취직을 했다.

돈을 버는 게 그렇게 좋았다. 사고 싶은 옷을 사고, 먹고 싶은 걸 사 먹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선물도 사드렸다. 적금을 들고, 보험을 들고, 학자금을 모두 갚았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벌어서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좋았다.



열심히 일하고, 살면 당연히 가난을 벗어날 수 있고, 정직하게 돈을 모으면 당연히 내 집을 살 수 있고, 열심히 공부하면 당연히 대학자금 걱정하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현실.

이것이 반전이 아니라 당연한 이치가 되기를 소망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죄와벌,살인자O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