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며칠 전, 새로 나온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에 잔인하거나 끔찍한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는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확인한 순간,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손석구.
개인적으로 이런 나쁜 남자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실제 같은 연기가 멋있어 그가 나온 작품은 꼭 보는 편이다.
‘살인자 ㅇ 난감' 시리즈의 제목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퍽이나 난감하지만, 내용은 꽤 단순하다. 언젠가 천상의 낙원 같은 캐나다로 떠날 꿈을 꾸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뭔가 억울하게 생긴 대학생 “이 탕”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은 자신의 친구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신분을 숨긴 채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살인도구였던 망치는 지나가던 개가 물어가 사라지고, 족적이나 지문은 비가 내려 모두 사라진다.
증거가 전혀 없는 살인 현장, 죽어 마땅한 연쇄 살인마의 죽음.
사람들은 탕이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탕이를 의심하기 시작한 형사가 한 명 있다. 바로 ‘장 난감’ 형사이다. 그는 증거 없는 살인현장에서 경험과 직감으로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탕이의 우연한 살인은 멈추지 않는다. 우연히 죽인 여자가 알고 보니, 부모를 살해하고 자신의 앞마당에 묻은 패륜아라던지, 우연히 죽인 학생이 알고 보니 여고생을 성폭행하고도 전혀 처벌을 받지 않은 학생이었다던지….
그런 탕이 앞에 노빈이 나타난다.
“나쁜 놈을 알아보는 그것이 바로 당신의 능력”이라고 높이 치켜세운다.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나쁜 놈들을 이 세상에서 제거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며 살인을 정당화한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더 악한 것인지, 살인을 당한 사람이 더 악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죄'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영화 중간중간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죄와 벌’ 책이 나온다. 영화에서 그 책은 탕이의 살인에 대한 결정적 증거물로 나온다. 나는 이 시리즈를 보기 며칠 전 이 책을 다 읽고 감동했던 터라 ‘살인자 ㅇ 난감’에서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를 볼 수 있었다.
죄와 벌은 러시아 문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설명하려면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는 1846년에 해성처럼 나타난 천재 작가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 후, 당시 러시아의 사상가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벨린스키(1811년 ~ 1848년)는 그에게 ‘새로운 고골’이라고 칭송했다. 고골(1809-1852, 러시아 문인)은 푸쉬킨과 함께 러시아의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린 가장 유명한 작가였다.
이렇게 천재작가로 등단했지만, 어느 문인들의 모임에서 금지된 서적을 읽고 자유주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처형되기 바로 직전, 황제의 특사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추위와 굶주림, 노역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가 읽을 수 있었던 단 한 권의 책은 바로 “성경”이었다.
무신론자에 현실주의자, 자유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는 그 후 회심을 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시베리아 유형과 성경은 후에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작품마다 무신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비교, 대치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죄와 벌의 주인공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법대생이다. 그는 매우 가난해서 학비를 낼 수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방세도 못 내고, 먹을 것도 없다. 집안에 웅크리고 누워 멍하니 시간만 보낸다. 아니, 이때 그는 삶의 정의와 가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죽어라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런 가난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며 노동력과 자본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이다. 이 노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 돈을 제때 값지 못하면 이자를 높게 매겼으며, 기한 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그 물건은 바로 처분했다.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이 노인에게 몇 번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 그는 이 노파가 사라지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착취를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 노파가 착취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사회정의를 실현할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급기야 그는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면밀 주도하게 준비한다. 결국 그는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만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노파의 이복 여동생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그 자리에 등장한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계획에 없던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세상에 이로울 것 없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우연한 두 번째 살인으로 인해 오류에 빠지고 만다. 리자베타는 전당포 노파와 다르게 연약하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사람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완벽에 가까웠다.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당시엔 과학수사도 없었으며 증거품은 깨끗하게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고 뒤를 쫓는 예심판사가 나타난다. 바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상태였다. 죄를 저지른 사람의 불안한 심리와 죄책감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연약한 심신은 여지없이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살인자 O 난감에서의 탕이도,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도 살인을 저지른 후 극도의 불안에 시달린다. 한편으론 죄책감이었을 것이고, 한편으론 경찰에 붙잡힐 것에 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에는 죄책감이 생긴다. 타인이 내 죄를 알든, 알지 못하든 한번 생긴 죄책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옥죄인다. 다른 말로 하면 양심이다.
'살인자 O 난감'과 '죄와 벌'은 닮았지만 다르다. 두 주인공 모두 죄책감을 느끼지만, 탕이는 도망치듯 필리핀으로 떠나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살인을 한다는 뉘앙스로 시리즈는 끝난다. 반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제 발로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시베리아로 떠나는 라스콜리니코프 곁엔 소냐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냐 역시 매우 가난한 집의 장녀로, 돈을 벌 길이 없어 몸을 팔아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소녀였다. 사람들은 그런 소냐를 사람취급 하지 않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소냐에게서 순수함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음을 소냐에게 고백한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희생한다. 자신은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린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교만한 생각을 뛰어넘는 소녀의 희생을 보며, 그게 사랑임을 깨닫는다.
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될까? 나는 양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양심은 인간이 인단갑게 살도록 신이 남겨놓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면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어렸을 적에 매우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군것질에 대한 욕망이 나를 유혹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빠의 주머니에서 훔친 동전으로 과자를 사 먹었다. 사춘기 시절엔 학교를 벗어나고픈 일탈에 대한 욕망에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언니의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만화방을 갔다.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언니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정말 부모님과 언니가 나의 소심한 도둑질을 몰랐을까????)
사회적 범죄자, 또는 죽어 마땅한 사람을 제거하더라도 사회정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머무는 한, 악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악한 세상이 여전히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랑과 희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른 탕이를 위해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사랑, 라스콜리니코프를 향한 소냐의 사랑이 결국 이 험한 세상을 조금 더 밝은 쪽으로 옮겨놓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이로운 사람으로 살지, 해로운 사람으로 살지, 그 모든 결정은 나에게 달렸다.
비록 우리를 둘러 싼 환경이 우리를 해로운 쪽으로 끌어당길지라도, 한 걸음을 이로운 사람 곁으로 옮겨보는 것이다. 비난을 일삼는 환경에서 조금 벗어나 배려하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보는 일이다.
세상엔 완전한 악도, 완전한 선도 없지만, 사랑은 아직 존재한다.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나의 의지와 선택으로 나의 가치를 조금 높일 수 있도록 사랑을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