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사이

by 박태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도시>


나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아파트 3단지에서 13년을 살았다. 이곳에서 7살부터 유-초-중-고 시절을 모두 보냈고 신촌으로 대학을 가게 되어 목동과 신촌의 중간쯤인 문래동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래서 나의 어릴 적을 떠올리면 온통 목동에서의 추억이 가득하다. 목동은 정부가 각 잡고 만든 기획 단지인데 1단지부터 무려 13단지까지 있는 3만 세대 대단지이다. 특이한 점은 단지 내에는 차가 못 들어와서 보행자와 자전거만 다닐 수 있었다. 주차장은 단지를 둘러쌓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선호도가 높았다.


어린 나에게도 이곳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단지마다 학교를 비롯해 슈퍼와 학원 등의 편의시설이 있었다. 놀이터도 한 단지마다 5개는 있었으니 어느 놀이터에서 모일 것이냐가 항상 관건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이 놀이터 저 놀이터를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찾고 함께 놀다 보면 하루가 갔다. 학원에서 매일 만나는 요즘 아이들이 노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맑은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모래밭 위에서 땀 흘리며 둥글던 그 기분을 알까?



<질레니얼 베이비>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논설문에 따르면 89-95년생은 성장기 과정 중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가장 뚜렷한 경험을 한 후기 밀레니얼 베이비라고 한다. 그리고 92~99년생은 질레니얼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나는 양쪽에 다 해당함으로 10대 시절을 온전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이다. 내가 20살이 됐을 때 첫 아이폰과 갤럭시가 출시됐으니 스마트폰과 와이파이가 없던 유소년 기를 보낸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다. 나는 디지털 문명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편이지만 개인적으로 아날로그 한 감성을 조금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전자책보단 실물 책을 좋아한다. 책을 만질 때의 촉감, 책을 폈을 때의 냄새, 책을 넘길 때의 소리 등이 주는 그 특유의 맛을 안다. 태블릿이 아닌 하얀 종이에 주황색 연필로 글을 쓰는 것만큼 몰입되는 경험은 없을 것이다.


나는 오토튠된 디지털 음악보단 여전히 90-00풍의 어쿠스틱 감성 음악을 더 선호한다. 내가 10살 때 2001년이었고 그때 처음 내돈내산한 테이프가 god 4집 <길>이다.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들고 목동사거리에 있는 테이프집에 가서 고심 끝에 고른 바로 그 테이프가 내 인생곡이 될 줄은 몰랐다. 날이 제법 쌀쌀하고 흰 눈이 뒤덮인 서울의 한겨울, 테이프를 움켜쥔 채 집으로 달려와 비늘을 뜯고 카세트에 넣고 틀었던 설렘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지금처럼 손가락만 까닥하면 제법 할 수 있는 게 많은 즉흥적인 디지털 경험보단 일련의 복잡한 과정이 요구되는 아날로그 시대에 나고 자란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이라고 자부한다.



<어린이날>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나는 아빠가 됐다. 5년 전쯤 목동아파트 단지에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건물이 높지 않고 놀이터가 크지 않아서 놀랐다. 어렸을 땐 놀이터나 운동장이 한없이 크고 넓게만 느껴져서 무궁무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무한한 공간처럼 느껴졌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초라하고 왜소했던 것이다. 어린이날만 되면 엄마아빠 손을 꼭 잡고 에버랜드나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가곤 했는데 작년에 딸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 의아했다. 동심의 눈으로 바라볼 땐 피터팬에 나오는 네버랜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원더랜드처럼 알록달록하고 한눈에 담기지 않던 공간이었는데 훌쩍 커버린 키와 놀이동산을 보고 신기해하지 않게 된 관점에선 예전과 같은 신비감은 없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반가움과 어렸을 때 느꼈던 설렘은 간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이 그 당시의 시간을 저장해 놓는다고 생각하는데 공간은 그때와 지금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데 공간은 세월이 흘러 일부는 변화하고 큰 모습은 그대로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돼 느끼게 한다. 나라는 존재는 동일한 인물이지만 테세우스의 배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됐다. 훗날 돌아보면 지금 함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추억이 되어 회상할 날이 올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니 여러 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아야겠다. 올해 어린이날은 딸과 함께 고향을 방문해보고자 한다. 딸에겐 어떤 추억을 남겨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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