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우리 집은 거실에 큰방과 작은방만 붙어있던 좁은 구조였기 때문에, 다섯 식구가 두 방에 나눠 자야 했다. 삼남매였던 우리는 몸집이 커져가며 점차 작은방에서 큰방으로 넘어갔는데, 나는 남동생 둘과 함께 자면서 그 어린나이에 근친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시절 나는 밤에 손만 잡고 자도 애가 생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점점 자라면서 남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자는 것이 불편해지던 차였다. 몸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싸고, 혹여 몸이 닿을라 치면, 정확히는 동생들이 잠버릇으로 나를 툭 치기라도 하면, 나는 응징이라도 하듯 동생들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그러면 그들은 잠든 와중에도 폭력을 피하려는 무의식의 생존기제가 발동되어, 이잉 거리며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굴러가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두 동생은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서 잠을 청했는데, 아침마다 자식들을 학교 보내려고 깨우러 오던 엄마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이 컸다. 동생들이 태어난 후,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형제가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군것질거리를 쌓아두고 먹을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았던 형편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가기 위해 부모님은 긴축재정을 벌이고 있었다. 과자 하나를 먹고 싶으면 5번이나 떼를 써야 하던 그 상황에 동생들이 태어나 간식거리는 3등분해야만 했다. 나는 동생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 본래는 나의 소유라고 믿었다. 그러자 그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아, 재들만 없었으면! 쟤들만 없었으면 나는 조금 더 배부르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초코바 하나라도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문제는 그들의 '박탈행위'가 비단 '식량' 항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사랑' 항목에서도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가져가는 지독하고 진득한 약탈자들이었다. 그들이 있기 전, 나는 엄마아빠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냈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일만큼 억울한 사건은 없다. 나는 갓 태어난 동생들이 내가 당연하게 차지했던 부모의 품을 정복하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만 했다. 미운 동생들은 어린 만큼이나 취약해서 툭 하면 울곤 하였기에, 분함을 풀 곳이라곤 없었다. 부모님은 첫째에게 응당 요구되는 자질, 양보와 책임감을 당연하게 요구했다. 그것은 마치 그동안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당연하게 받아온 애정에 대한 대가처럼 여겨졌다. 속상함이라는 이자가 붙은.
여하튼 태어날 때부터 나의 모든 것을 야금야금 빼앗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두 동생들에게 자잘하게 앙갚음 해왔던 나의 만행을, 마찬가지로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밤 중 동생들에게 몰래 가해지는 주먹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시작이야 왜 두 동생들이 나보다 좁은 공간에 구겨져서 자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겠지만, 개중 내 주먹질이 평소보다 강했던 날이면 잠결에도 울먹이는 소리가 부모님이 자는 작은방에까지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다급히 동생의 입을 손으로 막곤 했지만, 이미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울음까지 막을 도리야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날’ 엄마가 처음으로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종종 우리가 잠들기 전 함께 누워 책을 읽어주었다. 큰방이라고 하지만, 다섯 명이 누우면 꽉 들어찰 공간에 서서히 몸집이 커져가는 우리들과 엄마가 조금은 비좁게 모여 있으면, 이불 속은 금방 따듯한 요새가 되어 세상 어느 곳도 이보다 안락하지는 않을 듯하였다. (이 때에는 잠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들과 몸이 닿아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안락함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세상의 가장 불가피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죽음’과 ‘지옥’, 그리고 ‘신’을.
엄마와 아빠는 둘 다 종교가 없었고, 교회 나갈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따듯한 분들이었다. 더 어릴 적 그들이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는 우리들을 내버려뒀던 이유도 신보다는 또래들을 사귀라는 의중이 컸을 터였다. 무엇보다 교회에는 당신들이 풍족히 주지 못하는 간식이 널려있었고, 커서 생각해보건대, 주말만큼은 양육의 노고에서 벗어나고자 자식들을 그냥 내버려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그저 어린 자식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려는 깊은 헤아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종교에는 별관심이 없던 엄마, 굳이 따지자면 심심할 때 종종 사주를 보러가거나, 등산 겸 절에 갔다 오는 것 외의 종교 활동을 일절 하지 않던 엄마, 기독교와는 세상 그 누구보다 거리가 멀어보였던 엄마가 그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남매, 개중에도 이야기를 유독 좋아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신', 그것도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다.
"정화야,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대.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 해. 동생들도 때리지 말고."
아마 엄마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마디였을 것이다. 앞 문장들은 그 마지막 말을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 내가 왜 ‘동생들을 때리지 말’아야 마땅한지에 대해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놓는 대신(이것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즉 알고 있었다), 엄마는 형이상학적인 전제의 권위를 빌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피아노 학원에 꽂혀있는 '만화로 읽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애독자였고, 교회는 워낙 어릴 때 이후로 나가지 않았던 지라 목사님의 말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신’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던 엄마가 무척이나 생소한 화제를 꺼냈기 때문에 그 말들을 매우 인상 깊게 들었다.
"지옥은 무서운 곳이야?"
"엄청 무섭지."
"거기에는 뭐가 있는데?"
당시 내가 상상한 지옥의 이미지와 닮았다
엄마가 뜨거운 가마솥이나 악마 따위의 이야기를 해줬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의 내게 지옥에 대한 묘사가 가혹하게 느껴져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시에 내 존재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죽은 뒤에 그 끔찍한 곳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죽음도 두려운데 그보다도 두려운 일이 있다니!),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 가령 엄마나 아빠도 지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의혹들에 따듯한 이불 속에서도 식은땀이 흘렸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지금 한 집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우리들이 죽음의 순간, 최후의 기로에서 천국과 지옥, 즉 하늘과 땅만큼이나 확연히 갈라진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 영원한 이별만큼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설령 운이 좋아 천국에 간대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지옥에서 불타 고통 받고 있다면, 그곳은 지옥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은 전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미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닌가.
"엄마, 그럼 엄마도 지옥에 가?"
"왜?"
"엄마도 교회 안 다니잖아."
역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엄마는 일순 당황했지만, 20년 이상 차이나는 연륜의 힘을 입어 노련하게 대답을 피했다.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설득력 있는 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더 이상의 깊은 의문에 답하지 않기 위해 수미상관 식으로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지었다. 이야기의 목적이었던 간접적인 엄포를 빼먹지 않고.
"그러니까 정화야, 착하게 살아야 해. 알았지? 동생들 때리면 지옥에 갈지도 몰라."
나는 그 날 잠들기 전 지옥을 떠올렸다. 안그래도 어두운 밤, 눈까지 감으면 온통 암흑인 주변은 형벌이 일시중지된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그간 저질러온 온갖 악행들을 떠올리며 가슴 졸였다. 내가 엄마아빠한테 거짓말을 얼마나 했더라? 학습지 안 푼 것도 거짓말에 포함되겠지. 동생들 간식 뺏어먹은 건 어떡하지? 암흑이 무서워 조금의 빛이라도 찾아보고자 눈을 떴다. 주변의 동생들, 그 전까지는 한낱 장애물에 지나지 않던 그들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마음 한 켠 죄책감과 미안함이 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때린 것에 대한 미안함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정도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그간의 폭행은 다소 만회 받지 않을까'하는 약은 마음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이정도면 신도 나를 조금은 가엾이 여기사 죄를 깎아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잠에 들었다. 그날 밤은 동생들의 이잉거림이 없던 고요한 밤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것이야말로 신과 흥정하려는 교묘한 마음이었다. 얼마나 귀엽고 하찮은지. 무엇보다 엄마의 경고는 효과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함으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금방 잊고 다시금 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슬슬 머리가 굵어지던 동생들 또한 가만히 맞아주고 있지만은 않았으므로 죄책감이 고개를 들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간혹 막연한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하고 가슴이 턱 막혔다.
왜 잘못을 하면 지옥에 가고,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는지, 어린 나는 그 이유와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어떤 일이 착하고, 어떤 일이 나쁜지는 누가 결정할까? 신일까? 만약 착한 일을 7만큼 하고, 나쁜 일을 3만큼 하면, 나는 총합 4의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나쁜 일을 1이라도 하면 지옥에 가야하는 건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 착한일 5라면, 나는 1의 착한 일을 추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1의 나쁜 일을 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은메달 선수처럼 안타깝게 천국행 티켓을 박탈당하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나? 기준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여 내가,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죄악을 피하기 위해 주먹질 몇 번으로 동생들을 방구석으로 밀어보냈다면, 그것은 더 큰 죄를 피하기 위한 착한 일인가, 그럼에도 폭력을 행했으니 나쁜 일인가? 대략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엄마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엄마의 경고는 뿌리 깊은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깨워주었다(혹은 심어주었다). 어쩌면 기독교에서 ‘원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의 내게는 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아담과 이브의 원죄나, 형제를 살해하여 자기의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카인의 의식 등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였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종종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물씬 몰려오는 날이면 나는 엄마를 귀찮게 했다. 엄마는 ‘신을 통해 도덕적인 훈계’를 권하는 것이 더 귀찮은 일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이후로 신이니 지옥이니 하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밤에 몸이 닿는 것만으로는 임신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던 시기, 우리는 세 남매가 따로 방을 쓸 수 있는 신축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신에 대한 고민도 다소 잊혀져 갔다. 나는 여전히 동생들과 주먹질을 하며 바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뱉어진 말들은 영영 잊혀지기는 어려운 지라, 그리고 세 남매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줬던 경력이 쌓인 엄마의 생생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지라, ‘지옥이란 곳의 존재’와 ‘신’이라는 주제는 내 사색의 목록에 추가되었고, 이후 인생의 긴긴 탐구의 씨앗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