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더스틴 호프만과 함께 나온 <레인맨>이나 르네 젤위거와 커플로 나온 <제리 맥과이어>는 봤다. 그보다 유명한 액션 영화 <미션 임파서블> 나 <우주 전쟁>은 보지 못했다. 미션 임파서블 8탄이 제작되고 있는데, 1탄의 초반부를 보다 말았을 뿐이다. 줄을 매달고 거미 자세를 하는 그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중간에 포기했다. 액션 영화를 보지 않은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빠른 영화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글자 그대로다. 빠른 영화를 쫓아가지 못한다. 악당을 쫓는 주인공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열심히 따라가지만 놓치기 일쑤다. 시간이 갈수록 영화의 편집과 흐름은 빨라지는데, 나의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여기서 나의 특이한 습관이 나온다. 영화의 흐름을 놓치면 그때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빈 공간을 메꾼다. 어쩌면 이야기를 쫓아갈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을 보며 나만의 영화가 생겼다는 묘한 만족으로 오독을 합리화한다.
나의 거북이 습성은 ‘영화’ 뿐 아니라 무언가를 배울 때 여실히 나타난다. 학창 시절 예체능 시간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느린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리코더 부는 방법을 배울 때나 택견 동작을 익힐 때도 친구들은 손쉽게 따라하는 것 같은데 홀로 늦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었다. ‘국영수’는 머리에 들어오는 속도가 보이지 않는데, 예체능은 습득의 속도가 보여 무안하다. 그래서 국영수를 기반(?)으로 한 학문을 전공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영화를 전공하고 단편영화를 3~4개를 제작했다.
톰 크루즈의 액션을 놓치며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상상했던 버릇이 창작의 기반을 다듬었다. 머릿속 상상을 글로 옮겨 쓰는 순간은 혼자서 누릴 수 있으니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상상은 느리지만 설렘을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설렘이 영화를 제작하는 용기로 이어졌다. 영화에는 액션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는데 영화 현장이 액션 영화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현장에서 우리는 톰 크루즈가 되어야 했다.
톰 크루즈가 된 내가 쫓아야 할 것은 ‘시간 안에 찍기’ , ‘제작비 안에 찍기’ , ‘스텝들 능력 안에서 찍기’ 등등 한계들 속에서 영화를 찍어야 했다. 나의 '상상'과 마주하며 반갑게 인사할 틈도 없이 다른 컷을 찍어내야 했다. 선배들도 이렇게 영화를 찍었고, 선배의 선배도, 선배의 선배의 선배도, 아니 후배들도 모두 액션 영화 찍듯 영화를 제작하니 나 또한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오랜 시간 걸렸지만 잘 적응했다. 거북이도 바다에서는 빠르다고, 현장이 바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헤엄쳤다. 그런데도 마음 저편 묻어두었던 아쉬움은 늘 존재했다. 글이 살아 움직일 때의 감격, 상상 속 인물과 배우가 만날 때의 반가움, 우연이 가지고 온 행운 등등. 영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가치를 눌러 담기에는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나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물살에 휩쓸리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물살을 헤엄쳐 영화를 찍었으니, 이번에는 육지에서도 찍고 싶었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2021년 단편영화 <한비>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함께 작업한 배우들과 술을 마시며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당시 배우들도 나의 고민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했다. 본인들도 열심히 제작 속도를 쫓지만, 상황이 된다면 진득하게 시나리오 속 인물과 마주 하고 싶다고 했다. ‘진득하게’ 나의 소망이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진득하게 시나리오 보기’,’진득하게 스텝과 이야기 나누기’,’진득하게 배우의 연기를 기다리기’ 우리는 진득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그때 배우가 한 마디 얹었다.
“한 달 동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우리끼리 즐기면서 영화 찍으면 재밌겠다.”
*대부분의 단편영화는 3-6 회차다.
남들이 하는 대로 영화를 찍어도 세상에 나올까 말까인데, 우리만의 현장을 찾는다고? 가능할까. 그런데 내 안의 거북이는 육지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톰 크루즈가 아닌 우리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우리를 위한 영화를. 소중한 순간을 눌러 담아 진득하게 영화를 바라보겠다 다짐했다.
그림 - 진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