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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은행 파산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가 이상을 상징한다면 샌타클래라는 현실을 가리킨다

by 김삶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시 타스만로 3003번지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의 풍경이다. 파산 소식이 전해진 주말에 본사 건물을 찾았다. 유튜버가 간판을 찍고 있다. (촬영: 김삶)

지금 거주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실리콘밸리은행(Silicon Valley Bank, SVB) 본사가 있다. 근무하면서 종종 찾는 로컬 커피숍과 붙어 있어서 낯설지 않은 동네다. 지도 앱을 열어 확인하니 집에서 2.5마일,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걸어가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한산한 토요일 아침, 자동차로는 5분이 걸렸다. 네덜란드의 탐험가 ‘타스만(Tasman)’의 이름이 붙은 도로 3003번지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 본사 앞에는 이미 여러 대의 방송 카메라가 설치됐다. 중계차를 통해 보도를 준비하는 리포터의 모습도 보였다. 스마트폰을 들고 본사 건물을 돌면서 SVB 간판 앞에서 개인방송을 하는 유튜버도 여럿 있었다. 2023년 3월 11일 오전 10시 실리콘밸리은행 본사의 풍경이다.


실리콘밸리은행 본사를 찾기 바로 전날, 캘리포니아 금융규제 당국은 SVB 자산 몰수를 발표했다.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부(Department of Financial Protection and Innovation, DFPI)는 미국 서부시각 3월 10일 자로 공식자료를 배포했다. 캘리포니아 금융법 592조에 따라 실리콘밸리은행을 폐쇄하고 자산을 몰수한다는 내용이다. DFPI 최고책임자인 클로틸드 휼렛이 서명한 몰수 명령서도 공개했다. 이유로는 불충분한 유동성(liquidity)과 지불불능(insolvency)을 들었다. DFPI는 실리콘밸리은행이 샌타클래라에 본사를 둔 캘리포니아 인가 상업은행이자 연방준비제도(FRS) 회원임을 자료에서 밝혔다. 2022년 말 기준, 총자산이 2,090억 달러이며 총예금이 1,754억 달러라고 명기했다.


캘리포니아 금융규제 당국은 은행 자산을 몰수한 다음, 공을 연방 차원으로 돌렸다. DFPI는 자료 말미에서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FDIC)를 실리콘밸리은행의 수탁기관(receiver)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예금은 FDIC 지급한도에 따라 연방 차원에서 보호된다. 연방예금보험법에 따르면 단일계좌 당 지급한도는 25만 달러다. 공을 넘겨받은 FDIC도 공식자료를 내고 진행경과를 밝혔다. FDIC는 예금자 보호를 위해 ‘샌타클래라 국가예금보험은행(Deposit Insurance National Bank of Santa Calra, 이하 샌타클래라은행)’부터 설립했다. 실리콘밸리은행이 폐쇄됨과 동시에 모든 예금은 샌타클래라은행으로 이체됐다. 이에 따라 FDIC는 실리콘밸리은행 지점의 영업시간을 기존대로 유지하고, 온라인뱅킹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를 재개하며, 발행된 공식수표는 계속 처리(clear)할 것으로 발표했다. 대출고객은 예전과 같이 금액 상환을 계속해야 함도 고지했다. 은행 폐쇄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여기까지는 국내 언론에도 실시간으로 전해진 소식이다. 미국 주식시장이 받은 충격과 세계경제에 미칠 혼란을 예측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필자까지 비슷한 시각으로 접근해 일률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캘리포니아 금융보호혁신부와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가 공식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온라인으로 전문을 공개했음에도 대다수 우리 언론이 이보다는 1차 가공된 외신을 토대로 소식을 전한 사실이다. 외신 역시 미국 정부가 낸 입장에 기반해 뉴스를 생산하므로 한국어 사용자로서는 2차 가공된 우리말 소식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일련의 사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창업가와 스타트업을 주고객으로 상대하는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나서서 은행을 폐쇄하고 자산을 몰수했다. 몰수한 자산을 연방정부로 넘겼다. 이제 연방국가 차원에서 나서서 샌타클래라은행을 설립하고 자산과 서비스를 관리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사업자는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내세워 비즈니스를 해왔지만 국가는 ‘샌타클래라’ 간판을 내걸고 문닫은 은행을 수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실리콘밸리와 샌타클래라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실리콘밸리은행이 창업한 시점은 1983년 10월 1일이다. ‘실리콘밸리’라는 개념은 그로부터 약 13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 1970년 1월 11일, 미국 저널리스트 돈 호플러(Don Hoefler)는 샌프란시스코만을 둘러싼 지역에서 급성장 중인 반도체산업을 다루는 시리즈 기사를 쓴다. 뉴욕 전자뉴스(Electronic News) 1면에 실린 기사 제목은 ‘미합중국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U.S.A.)’였다. 호플러는 샌타클래라 밸리에 자리잡은 반도체 회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반도체를 만드는 물질 ‘규소(Silicon)’를 갖다 붙였다. 호플러가 1986년에 사망했으니 실리콘밸리은행이 문여는 모습을 분명 지켜보았을 것이다.


샌타클래라 밸리가 실재하는 공간이라면 실리콘밸리는 엄밀히 말해 가상의 개념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실리콘밸리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수치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행히도 ‘조인트벤처 실리콘밸리’라는 기관과 지역학연구소가 힘을 모아 1995년부터 연초마다 실리콘밸리색인(Silicon Valley Index)을 발간하고 있다. 올해 2월에 나온 2023 실리콘밸리색인은 “실리콘밸리는 무엇인가(What is Silicon Valley)?”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색인의 설명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는 지난 50년 동안 기술혁신으로 세계를 재편하며 가파르게 성장한 역동적 지역경제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지리적 경계는 정의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고 있다. 색인은 샌타클래라 카운티에서 시작된 실리콘밸리가 현재 샌마테오, 샌타크루즈, 알라미다 카운티까지 확장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가장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는 실리콘밸리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통계를 조금 더 살펴보자. 2023년 실리콘밸리에는 300만 명이 산다. 일자리 수는 163만 개다. 평균 연봉은 약 18만 달러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61%고 미국 외 출생자가 39%였다. 성별은 남성이 52%, 여성이 45%다. 3%는 성별 구분을 거부했다. 인종은 백인이 30%, 히스패닉이 25%, 아시아계가 37%를 차지했다. 아시아계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중국계가 전체의 12%, 인도계가 8%, 베트남계가 5%, 필리핀계가 5%다. 한국은 전체의 7%에 속하는 기타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됐다.


이 통계는 실리콘밸리의 추이와 현황을 살피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되지만 정부 차원의 공신력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미국 노동부의 정의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는 앞서 언급한 4개 카운티 말고도 샌프란시스코 카운티와 콘트라코스타 카운티를 포함한다. 이 기준대로면 유명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도 실리콘밸리에 해당된다. 더욱 급진적인 시각으로 나아가면 실리콘밸리를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고방식(mindset)이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미국 내에서도 실리콘밸리 개념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갖추기가 어려운 점을 방증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 국가가 나서서 자산을 관리한다. 미국 정부는 실재하는 지역을 바탕으로 이번 사태를 수습해나갈 수밖에 없다. 국가예금보험은행을 설립하면서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본사가 위치한 샌타클래라를 이름으로 내세운 까닭이다. 실리콘밸리가 이상을 상징한다면 샌타클래라는 현실을 가리킨다. 혁신과 테크놀로지는 태생적으로 이상과 미래주의를 지향하지만 철저한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음을 이번 실리콘밸리은행 폐쇄 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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