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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h Oct 11. 2024

한때는 선의가 세상을 바꾼다 믿었다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후기


1. 한때는 선의가 세상을 바꾼다 믿었다.


내가 처음으로 목도한 익수 사고는 2023년 8월, 계곡에서 벌어졌다. 아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물에서 끌려 나온 그는 숨을 쉬지 않았다. AED(자동제세동기)를 찾아 먼저 달리기 시작한 것은 친구였다. 나는 뒤이어 그를 따라 달렸다. AED의 행방은 묘연했다. 계곡 인근 마트에서도, 심지어 인근 약국에서조차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 AED는 사고 장소에서 800m 떨어진 공중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위이잉, 비상음을 내지르는 박스를 뒤로 한 채 우리가 사고 장소로 도착한 것은, 사고 발생 이후 10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그는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병원에 실려간 그를 잊지 못해 며칠간 매일매일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각종 물놀이 장소에서 발생한 익수 사고를 모아둔 기사들의 내용은 일관성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날의 익수자가 의식을 찾은 채 이송됐다 말했고, 누군가는 그가 심정지 상태로 이송됐다 말했다. 나는 막연히 전자를 그리며 8월의 남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더 이상 관련 기사가 올라오지 않게 된 9월의 어느 날,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꾸만 떠올리고 있었던 나는, 유튜브에서 마구잡이로 인명구조 영상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헐떡임이 심정지 호흡이었을 수도 있었단 사실을, 그에게 이미 죽음이 당도해 있었을 수도 있었단 사실을.


무력감은 서서히 찾아왔다. 한겨울의 날씨에 얼어버린 피부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듯 무감각하기만 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심해의 바닷물에 몸이 짓눌리는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왜 조금 더 빨리 AED를 찾아 뛰지 않았는지? 동시에 나는 AED를 갖고 사고 장소로 돌아와 구급차를 기다리는,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긴 했으나 선의라면 선의라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은 것에 괜한 원망을 품게 되었다. 선의는 대체로 보답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내가 한때 선의 그 자체가 세상을 바꾼다 믿었음을, 그 한때를 방금 지나쳐왔음을.



그렇다면 무엇이 세상을 바꿀까.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 답을,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이하 <어바등>)에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어 이렇게 글을 쓴다.





2. 세상을 바꾸는 것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마천루와 다르게 지구의 중심을 향해 뻗어나가는 3000m 길이의 첨탑, 북태평양해저기지. 이곳은 웹소설 <어바등>에서 21세기 후반, 걷잡을 수 없는 환경오염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인류가 새로이 택한 해저라는 보금자리이다. 그리고 이 첨탑은 소설의 시작부터 테러로 인해 붕괴되며, 차오르는 물과 어둠으로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그들을 공황에 빠트린다.


그리고 이 순간, 사람들의 어둔 심연은 그보다 어두운 심해에서 밝게 빛난다. 그리하여 해저기지에서 치과의사로 근무한 지 고작 닷새밖에 되지 않은 주인공 박무현은, 차오르는 심해의 한기가 아니라, 통제를 잃은 사람들의 악의로 빚어진 총과 이기심으로 조각된 총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러나 전형적인 선인으로 그려지는 박무현이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육지로 향하는 여정을 거듭하면서도 어리석다 생각될 만큼 누군가를 해치길 망설이고, 일전 자신을 해쳤던 사람에게조차 복수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그는 철저하게 무능하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 해저기지에서, 치과'의사'인 그는 죽은 이에게 사망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인물이지만, '치과'의사이기에 죽어가는 이를 살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바등>에서 '선'은, 이토록 무력하다. 그리하여 <어바등>에서 선의는 쉬이 악의에 앞설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 자신의 밝은 불빛만으로 악의를 덮을 수 있는 무언가도 아니다. 선의는 그저, 선함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어바등>은 괴로워하고 고뇌하지만 결국 '선의를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인물, 박무현을 그리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누군가의 의도, 능력과는 무관하게, '행하는 자'와 '행동'의 결과만이 결말을 바꾼다.


실제로 작중에서 일반인에 불과했던 박무현은, 자신을 향한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그저 본인이 믿는 정의를 행함으로써 묵묵히 사람들을 육지로 내보낸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총알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테러 상황에 휘말려 정신없이 허우적대면서도, 함께 육지로 향하는 사람들에게서 등불을 발견해 가며, 악의가 사람들을 바닷속으로 끌어당기는 매 순간 묵묵히 등불을 자처해 가며, 계속해서 사람들을 육지로 끌어낸다. 그렇게 선한 주인공과 악한 테러범들의 대립, 선의와 악의의 줄다리기는, 비록 박무현이 손가락 2개를 바다에 제물로 바쳐야 했으나,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일상에 복귀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이 소설 속에선 선의가 승리한 것이라고, 그러나 다만 항상 선의가 악의를 이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승리한 것은 아니라고, 해저기지를 무너뜨린 악의는 감히 행해져 해저기지를 무너뜨렸으나, 그에 필적할 만큼 선의 역시 행해졌기에 결말이 희망찼던 것이라고, 그러니 선의는 그 자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보다는 선의든, 악의든, 그 어떤 의도와 능력과도 관계없이,


'행동'만이 세상을 바꾼다고.


<어바등>이 '행동하는 인간'에 보내는 찬사는, 작중 박무현의 주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신해량이란 인물의 에피소드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해저기지의 엔지니어인 신해량은 작중 시점으로부터 몇 년 전, 계곡에서 갑작스레 불어난 물로 인해 애인이 변을 당한 이후 불면증을 앓는다. 그리고 불면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팀원들에게 "무의미한 복수"라도 해야겠다 선포하고선 정말로 6억이란 돈을 들여 "무의미한 복수"를 실행하고, 불면증에서 벗어난다. 그는 천재지변에 어떻게 복수한 것일까. 매년 몇 명씩 죽어나갔다는 계곡을 방치한 지자체에 소송이라도 걸었나 싶은 추측을 허무하게 종결시켜 버린 그의 복수는 이러하다:


겨울철에 계곡물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기간 동안 계곡 바닥을 흙과 모래, 돌로 메운 후, 커다란 돌들을 이용해 바닥을 평탄하게 만드는 공사가 열흘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계곡에서 제일 위험했던 장소들의 수심이 성인 허리나 가슴 정도의 높이로 바뀌어 있었다.

(중략) 계곡 밖에는 온갖 안전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백애영은 해당 계곡 관련 사진으로 자주 보았던 색이 바랜 데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작은 입수 금지 팻말이 사라지고, 커다랗게 입수 금지나 음주 후 수영금지, 위험한 장소이니 수영을 삼가라는 내용의 경고문구 표지판이 반짝반짝한 새 걸로 설치되어 있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낡아서 떨어지기 직전의 밧줄들은 죄다 사라졌고, 새로 설치된 튼튼한 밧줄들이 튜브와 함께 계곡을 거의 빙 둘러싸면서 배치된 상태였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417화
연산호 저


즉, 그의 "무의미한 복수"는 계곡으로부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힘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해량이 행한 것은 - 그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 말 그대로 "복수"이다. 그러니 그가 다른 누군가가 그 계곡에서 또 죽지 않기만을 바랐기에, 오롯이 선의를 행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계곡에 벌을 내린 것은 아닐 테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행동에 '무의미한'이란 수식구를 붙인 것을 보았을 때, 그의 행동의 근원적인 원천은 아마도 애인을 잃은 슬픔과 향할 곳 없는 분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가 행동한 결과로 계곡은 모두에게 안전한 곳으로 바뀌었으며, 계곡은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꾼 것은, 여기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었던 것'은 결국 또다시 누군가의 '행동'인 것이다.





3. 끊임없이 의심하자, 그리고 행하자.


10대 시절 나는 세상이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항상 나아지는 곳이라 믿으면서, 악의만큼이나 선의가 강하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나를 선하거나 고결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를 행동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행동하더라도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러 일을 겪으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었든 '행동'뿐이라 믿게 되며, 내가 세상의 불합리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바뀌었다. 다른 이들이 부조리에 갖는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영향을 받아왔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 어떤 감정을 내보이든 간에,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우습게도 세상이 부조리하다 외치는 이들 중 자신의 정의를 관철해 내는 이는, 작은 행동으로라도 자신의 정의를 실천하는 이는 정말 드물었다. 그걸 발견한 이후, 발화되었으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 실상 발화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생각들과 감정은, 내게 더 이상 주목할만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행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행동하는 내가, 행동하지 않는 이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없이 묵묵히 움직이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내게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여름은, 행동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한 계절이었다.


우습게도 한동안 작년 여름의 일을 잊고 지내던 나는,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던 올해 6월, <어바등>을 읽고 다시금 그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계곡에서 벌어진 익수 사고를 다룬 신해량의 "무의미한 복수" 에피소드를 읽으며 끊임없이 상상했다. 내가 놀았던, 동시에 누군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계곡이 소설에서 그려진 대로 바뀌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비록 6억이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그 계곡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어졌다. 익수 사고가 나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저 옆 공중화장실에 AED가 있으니 얼른 뛰어가서 가져오라고, 당시 내게 너무나 간절했던 내용이 담긴 현수막을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난 7월, 나는 답사 차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사고가 났던 그 장소는 꼭 소설에 나온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하상면으로 인해 군데군데 키 높이를 넘어가곤 했던 수심은 가슴께로 통일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을 빠뜨려 물 먹게 했던 구덩이들은 말끔히 메워져 있었다. 또한 유수의 흐름이 개선된 덕분인지 육안으로 수심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탁했던 물은, 이젠 물 밖에서도 자갈돌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맑아져 있었다. 게다가 인근의 주의문구를 담은 안내판은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사고가 발생했던 그 장소 바로 근처엔 구명튜브가 하나 더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두 해당 계곡이 위치한 시에서 하상정비 사업을 시행한 결과였다.


맑아진 계곡물


그 계곡을 쭈욱 돌아보는 동안, 나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마 해당 사업은 누군가에겐 매년 해야 할 업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 변화가 오로지 누군가의 선의에 의해 행해진 일이었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업이 선의든 의무든 그 무언가에 의해 시행되었든 간에, 계곡은 누군가가 움직인 덕분에 더 이상 사람을 해칠 수 없는 벌을 받게 되었다. 내가 손 놓고 있던 그 순간에도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집에 돌아온 후 민원을 하나 넣었다. 해당 계곡에 AED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지판을 설치하고, 현수막을 게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주일 만에 받은 답변은 이랬다: 해당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며", 그 사이에 "현장에 출장을 다녀왔"다고.


'계곡 인근 AED 위치와 수난사고 대처 방법 관련 현수막 게시 및 표지판 설치 건'에 대한 민원 답변 내용


내가 한 일은 고작 민원을 넣는 '아주 작은 행동'이었다. 실제로 내가 건의한 대로 계곡이 바뀌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만약 계곡에 그런 표지판이나 현수막이 설치된다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 그는 AED를 조금 더 빠르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이를 살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민원을 넣기까지 1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나는 또다시 나의 선의가 - 또한 악의 역시 - 그 자체로는 어떤 힘도 지니지 못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들은 내가 행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선의에 가까운 것인지 계속하여 의심하면서, 그 행동이 불러올 결과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것이다. 비록 내 바스락거림이 누군가를 귀찮게 할지언정, 나의 사소한 외침 하나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행할 것이다.


아마 그 계곡이 평탄해진 것처럼, 세상은 이렇게 서서히 변해가는 곳일 테다. 부조리를 하나씩 바꾸어나가는 곳. 그래서 그 모든 변화에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 우리가 직접 손으로 빚었기에, 혹은 누군가가 빚도록 놔두었기에 만들어지게 된 곳. 그래서 내가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도 나의 의무가 따르는 곳. 이 세계에서 내 위치를 정확히 알고,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을 수행하는 곳.


그러니 나는 내년에도 그 계곡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방식으로 이곳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 241011 작성

** 물놀이를 가기 전에는, AED 찾기 서비스를 이용해 AED 위치를 확인하고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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