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후기
종종 양팔저울에 현재를 달아본다. 다른 접시 위엔 고리타분한 과거 대신 살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현재가 오른다. 대개 저울은 지금의 삶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두 삶의 무게는 때때로 비슷해지고, 저울은 동요하고, 또 어느 날엔 살아볼 수 있었을 다른 삶이 물을 빨아들인 솜처럼 너무나 무거워지고, 저울은 돌이킬 수 없을 듯 기울어져 버린다.
그럴 때면 그럭저럭 운치 있게 느껴지던, 눈앞에 펼쳐진 설원이 막막해진다. 눈에 새겨진 발자국을 되밟아 삶을 바꾸어놓은 분기점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발자국은 이미 신발 밑창까지 따라붙어 있고, 그것을 따라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한들 그 흔적은 메워지지 않고, 삶의 비가역성은 겨울바람만큼이나 시리고, 그 추위에 몸이 떨려오고, 후회는 발에 짓밟힌 눈처럼 질척이고, 삶은 견뎌내야 할 고통으로 변모하고, 삶에서 낙오된 내 앞엔
펼쳐진다, 상상이.
단지 찰나의 시간을 지불함으로써 맛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가지를 치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상상. 그때 그걸 택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때 그걸 택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생각이 상상에 삼켜질수록 나는 특별해진다, 가능성 위에 존재하는, 내가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삶이자 내가 '살아볼 수 있었을 삶'은 빛바랜 현실과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 나는 알지도 못하는 새에 내 삶을 빼앗긴 기분에 휩싸인다.
광채 어린 상상의 덫은 우리가 삶에 회한을 느낄 때 입맛을 다시며 다가온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주인공 '에블린'도 이를 피해 가지 못한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인 에블린은 타국에서 생계를 위해 세탁소를 운영한다. 그러나 그의 세탁소 운영기는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는 끝없이 몰아치는 성가신 손님들을 응대해야 하는 와중에, 세탁소 운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 세탁이 완료된 옷가지에 모조 눈알을 붙이곤 하는 - 남편 '웨이먼드'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게다가 그에겐 부양해야 할 아버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달라며 항의하는 레즈비언 딸 '조이'도 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그의 세탁소가 심각한 세무 문제에 처해있단 사실이다. 수많은 영수증을 처리해 국세청에 방문해야 하는 에블린. 결국 그는 영수증이 늘어진 탁자 앞에 앉아 탈진한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막대한 질량의 막막함. 끝없이 돌아가는 드럼 세탁기의 원형 창은 그가 쳇바퀴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말해오는 듯하며, 국세청 직원이 고쳐줄 것은 지시한 영수증의 동그라미 표시는 마치 그가 살아온 삶의 문제를 콕 집어 지적하는 듯하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원의 형태는 원에 깃든 연속과 영원이란 메타포에 기대어 에블린이 삶에 덧없음을 느끼고 있다는 걸 전달한다. 그리고 이 이어지는 원들의 향연 속에서, 삶의 지루함과 염증 끝에서, 에블린은 마침내 '살아볼 수도 있었을 삶'을 향한 미련과 상상에 빠져든다.
<에에올>은 그의 상상을 또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멀티버스'란 SF소재를 통해 실현시킨다. 에블린은 멀티버스를 통해 자신이 살아볼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에블린의 삶'을 환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는 어떤 세계에선 배우였으며, 또 다른 세계에선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기술을 개발한 세기의 과학자였다. 더불어 또 다른 유니버스에서 건너온 그의 남편은 그에게 당신은 더 큰 일을 할 존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비록 지금은 불우하게도 생계를 위협하는 중대한 세무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사실 에블린은 세무 같은 소시민적 일을 처리하는 사람 따위가 아니라 멀티버스의 붕괴를 저지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인물이라 속삭인다.
자신이 지닌 끝없는 가능성과 잠재력, 또 다른 세계에서 이미 꽃 피운 그림 같은 삶. 현실과 대비되는 가능성의 삶 속에서 에블린은 점차 현실과 유리된다. 에블린에게 현실은 덧없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착하기만 한 남편은 짐이 되며, 딸은 그저 성가시기만 한 존재가 되고, 세탁소는 부서져 마땅한 것이 되어 간다. 그에게 또 다른 삶은 더 이상 가능성의 삶이 아니다. 그것들은 에블린이 빼앗긴 삶이다. 결국 에블린은 참을 수 없는 현실에 결국 지긋지긋한 세탁소의 유리창을 깨부순다.
그러나 너무 많은 멀티버스를 지나온 탓일까.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남편은 그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고, 그의 딸 조이는 자신과 자신의 여자친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에블린을 뒤로한 채 뛰쳐나간다. 지쳐버린 에블린의 앞에는 어째선지, 망가진 현실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우습게도 동그란 베이글에서 출발한다. 작중에서 에블린의 대항자이자 또 다른 유니버스의 에블린에게서 태어난 '조부 투바키'는, 이 우주의 모든 유니버스를 파괴하기 위해 조이의 몸을 빌려 에블린 앞에 나타난다. 그는 <에에올>의 2부 'EVERYWHERE'에 이르러 삶의 모든 것을 올려두었다는 베이글의 원형 구멍을 가리키며, 동시에 삶의 권태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원형의 블랙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삶은 이렇게나 공허한 것이라고. 그러면서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에게 자신과 함께 저 블랙홀을 향해 들어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둥그런 베이글처럼, 우리의 삶을 잡아 삼키는 갖가지 동그라미들처럼 정말로 염세와 허무로 가득 차있을까.
그 순간,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에블린은 또 다른 유니버스의 웨이먼드가 또 다른 유니버스의 자신에게 "당신이 내게 다시 상처를 주더라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다른 삶에서는 당신과 빨래방도 열고, 세금도 내면서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을 목격한다. 에블린은 다른 유니버스에서도 자신을 사랑한 웨이먼드를 보며 그 사랑이 다른 세계에서도 변치 않았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 모든 애정과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삶이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한 깨닫는다. 비록 방식은 달랐지만 웨이먼드도 그 자신의 방식으로 싸워왔음을, 그 방식이 '친절함'이었다는 것을, 그 '친절함'이 주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 친절함으로 자신의 삶 또한 행복해졌다는 것을, 자신이 그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에블린은 구질구질한 현재의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살아볼 수도 있었던 삶'에 심취하여 그가 잠시 있고 있었던, 그가 '살아온 삶'의 특별함을 발견한다. 그래, 에블린의 삶에는 딸 조이가 있고 남편 웨이먼드가 있었다. 그의 삶은 특별하고 소중한 이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삶은 타인의 친절함과 애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쳇바퀴 같은 삶과 허무와 염세를 표상하던 원의 의미는 비로소 변혁을 맞이한다. 웨이먼드의 '친절함'의 방식을 수용한 에블린은 자신의 이마 중앙에 모조 눈알 -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인 '친절함'에 대한 깨달음의 상징 - 을 붙이고,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을 한 명씩 도와주며 조부 투바키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것과 싸워온 지금까지의 자신과 다르게,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을 친절히 도와줌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원은 더 이상 허무와 염세가 아니다. 삶을 향한 증오가 아니다. 다른 삶을 향한 열망이 아니다. 원은 현재의 삶을 향한 애정, 그를 가능케 해 준 사람들을 향한 친절함이다.
마침내 조부 투바키에게 다다른 에블린은, 삶의 허무 속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향해, 아니, 그의 딸 조이를 향해 힘껏 손 뻗는다. 그는 조이를 포기할 수 없다. 에블린의 '살아볼 수도 있었던 삶'에는 그가 사랑하는 조이가 없으므로, 이제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만 조이와 웨이먼드가 존재함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절대 다른 삶으로 대체할 수 없으므로.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살아온 삶에 있으므로.
그리하여 에블린은 세탁소를 뛰쳐나간 조이에게 말한다. 이 삶은 지긋지긋하고,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마침내 '살아온 삶'에 질량이 더해진다. 저울은 다시금 현재의 삶으로 기운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가족의 존재, 자신의 삶을 절대 거래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존재들의 질량.
그 무게감에, 비로소 에블린은 미소 짓는다.
한때 나는 삶의 분기점으로 돌아가고자 6개월을 투신했다. 내가 돌아가려던 것은 19살의 분기점이었다. 당시 나는 총 학비가 약 6000만 원에 달하지만 졸업 후 높은 직업 안정성과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학교와, 직업 안정성 및 소득은 예측할 수 없으나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배움에 한이 깊은 어머니가 항상 '너만은 대학에 보내주겠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자랐으나 그와 함께 고등학교 재학 3년 내내 휘청이는 집안 재정 상태를 질리도록 들었던 탓에, 내가 학비가 높은 학교로의 진학할 경우 학비를 충당하기 위한 빚으로 인해 내가 가족을 먹여 살릴 당나귀로 살게 될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학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나귀로 살고 싶지 않으면서도, 타 지역에서 홀로 생활비와 월세를 벌 자신이 없으면서도, 생명 계열보다는 이공 계열이 적성에 맞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그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학비를 듣곤 '안 가면 안 되나'라고 말했다. 나는 그리 하겠다 말했다.
담임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와 학비야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 된다고, 2년이면 갚을 수 있다고, 생활비랑 월세는 과외로 벌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대로 하는 대신 아버지의 말을 도피처 삼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큰돈을 모았던 어느 날, 통장에 모인 돈을 보던 나는 찰나의 뿌듯함 끝에서 공허함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너무 뭘 몰랐었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담임 선생님의 말은 정말로 옳은 말이었다. 그렇게 무섭던 월세와 생활비는, 내가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별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 나는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 합격했던 과에 진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비슷한 과에라도 진학할 작정이었다. 나는 그간 모아둔 돈으로 학원비를 내고, 인강을 결제했다. 내 생애 가장 큰 지출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 즈음 나의 저울은 정신없이 요동쳤다. 하지만 요즈음 내 저울은, 도통 또 다른 삶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한때 나는 내가 '살아볼 수도 있었을 삶'을 그리워했다,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것이 내 삶이 되었으면 했다, 겁도 없이. 그러나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삶의 비가역성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소중한 이들로 구성된 현재의 삶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다.
나의 삶에 쌓여온 소중한 존재들. 내가 만약 그때 다른 분기점을 택했더라면 나는 캠퍼스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놀던 추억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친구와 이렇게까지 친해지진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결과 소중한 다른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친구들과 얘기하고 대화하며 나의 삶과 동떨어져 있던 타인의 삶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고,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방법 또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지금의 이 시각은, 내가 너무나 충만함을 느끼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내가 살아온 삶이 없었더라면 결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은 수많은 멀티버스에서 유일하다. 그런고로, 나는 이 삶을 애정한다, 아낀다, 결코 다른 삶과 바꿀 수 없다. 마치 에블린이 그랬듯이.
내 저울은 이제 때때로 요동칠지언정, 쉬이 다른 삶으로 기울지 않는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 타인에게 친절하자, 그들은 우리의 삶에 질량을 더하는 존재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