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 의미를 중점으로
아마 신카이 마코토는 미야자키 하야오 다음으로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인 애니메이션 감독일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을 국내에서 알린 작품은 단연 ‘너의 이름은’이다. 기존에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는 멋진 화면과 호불호 갈리는 각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신카이 마코토가 자신의 색깔을 조금 내려놓고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너의 이름은’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각본과 멋진 애니메이션, 음악으로 관객에게 격정적 감격을 일으키는 방식을 택했다.
나는 그래서 ‘너의 이름은’을 인스타 맛집 같다고 생각했다. 보기에는 좋지만, 나머지는 그에 못 미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작품 내에서 전부 설명되지 못한 부분을 영화 제작 당시부터 집필한 소설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실망스럽다. 소설을 팔기 위해 영화를 의도적으로 축약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 작품은 어쨌든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화면을 보여주는 감독이기 때문에 빠짐없이 챙겨보는 편이고 ‘스즈메의 문단속’도 역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내 생각보다 너무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깊이 보지 않는다면 ‘트라우마를 이겨낸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의 요소들은 지진과 지진피해자들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짚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인공 ‘스즈메’는 부모님을 지진피해로 여위고 이모와 함께 살고 있는 여고생이다. 이 세계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라는 존재가 있는데, 이 미미즈가 나타나는 문을 닫는 일을 하는 ‘소타’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문을 닫는 일을 함께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이 주된 작품의 내용이다.
나는 먼저 ‘문’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작품에서 주된 소재인 문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지진(미미즈)의 원인이고, 두 번째는 지진피해자들의 아픔이다.
먼저 문이 지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염두에 둔 채, 소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소타는 ‘문을 닫는(지진을 막는)’ 일을 하는데, 이 일은 작중에서 묘사하기로는 미미즈가 나타남으로써 발생하는 지진의 규모에 따라 그 위험도는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규모에 따라 거의 목숨을 걸 수도 있게 되는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소타는 지진피해를 대신 뒤집어쓰는 일종의 대리인이자, 지진피해자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비교적 작은 지진이 일어날 때는 사소하게 다치는 정도가 다였지만 도쿄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미미즈를 막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요석‘이 되는데, 이는 작중에서 언급되는 바에 의하면 죽음과 거의 같다. 발생할 지진의 크기와 소타가 입는 피해의 정도가 비례하는 것을 봤을 때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으로 나는 지진피해자들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문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만남과 이별의 매개이면서 대단히 일상적인 소재다. 문이 열고 닫히는 것으로 만남과 이별을 은유하는 표현은 여러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점은 후에 엔딩에 대해 말할 때 덧붙여 말하겠다. 우선 여기선 문이 지진피해자들의 아픔을 상징하고 있다고만 기억해 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스즈메가 소타에게 한 눈에 반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급진적이고 과하지 않은가이다. 예로 작중에서 ’소타가 없는 세상이 두렵다.’라고 언급하는데 이와 같은 행동들이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지만 공감하기 힘들다는 관객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작품 외적인 방면에서 봤을 때 충분히 납득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소타는 작중에서 지진피해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스즈메 또한 지진피해자를 의미한다. 두 인물의 차이점은 소타는 지진피해로 사망한 피해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스즈메는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 유족 피해자들을 의미한다. 스즈메는 이미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인물이고 작중에서 소타는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두 번이나, 심지어 이번엔 눈앞에서 인연이 있는 인물을 지진으로 잃는다는 것은 충분히 ‘두려운’ 일이 아닐까. 지진피해 생존자가 지진피해 탓에 죽은 인물을 구할 수 있다면, 너무나 구하고 싶지 않을까.
또 하나 지적하는 부분은 엔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 미디어콘텐츠의 클리셰인 다녀왔어-어서 와 엔딩을 취하고 있다. 이 엔딩은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반복해서 보인터라 ‘오글거린다’는 사람들도 많은 호불호가 있는 방식이다. 나 역시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의 다녀왔어-어서 와 엔딩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앞에서 말했던 문이 지진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는 화제와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살펴봐야 할 한 신이 있는데 과거에 일어난, 스즈메가 부모를 잃게 된 지진 당일 다른 희생자들의 회상을 보는 신이다. 이 신에서 보여주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진 당일 문을 나서며 “다녀올게”라고 인사했던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유족들은 문을 나선 이들에게 “어서 와”라는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마음에 상처가 남았고 바로 이것이 내가 문이 지진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고 해석하는 이유다. 굳이 이 신을 시간을 들여 할당한 것을 봤을 때 과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클리셰적인 다녀왔어-어서 와 엔딩이 특별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재회한 둘. 스즈메가 소타에게 “어서 와.”라고 인사하는 엔딩은 각 인물이 상징하는 바를 생각해 봤을 때 더욱 각별하다. 유족 피해자의 상징(스즈메)이 사망한 피해자의 상징(소타)에게 하는 인사, '어서와'는 분명 실제 지진피해자들에게도 큰 위로가 됐으리라 생각한다.
반면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불친절하다. 내용 전개에 필수적이지 않은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쳐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작품 외적인 소재들을 생각하지 않고 감상했을 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트라우마를 이겨낸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스즈메가 소타에게 반한 이유, 스즈메의 행동들이 공감하기 어렵고, 특히 ‘다이진’과 ‘사다이진’, 미미즈 같은 환상적 존재들의 기원이나 무엇인지 같은 것들을 그냥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전자의 경우는 그나마 내용을 통해 합리적인 추측이라도 가능한 반면 후자는 정말 상상하는 수 밖에 없다. 특히 후자는 일본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내용인지라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주 소재가 다소 제한적인 공감대를 갖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미미즈가 나타나는 장소는 실제 일본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던 현장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현지 사정에 관심이 깊지 않은 외국 관객이라면 공감하기 힘든 소재다. 지진을 어떤 비유가 아니라 그대로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대단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나는 그 이유를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주제의 선택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지진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다. 그 위로의 과정 안에서 담고 있는 ‘트라우마의 극복’은 어느 사람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제다. 누구나 크고 작은 트라우마는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불친절하지만, 주인공의 트라우마 극복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직접 다가오기 때문에 제한적인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보다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내가 아쉬운 부분이라고 언급했던 불친절함이다. 나는 어느 정도는 이 불친절함 덕에 더 넓은 관객층에 어필할 수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전통적인 소재는 어떤 국가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역사적, 정치적인 여러 가지 문제로 콘텐츠에서의 ‘왜색’을 비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요즘은 대부분이 이것을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 신화와 설화에 기반한 설정들이 산재 되어있다. 예를 들어 미미즈와 요석이라는 설정은 일본 신화에서 땅속에 사는 지진을 일으키는 거대한 메기 신과 그를 억누르는 요석을 땅속에 박아 누르고 있는 두꺼비 신의 이야기에 그 기반이 있다. 그러나 본 작품은 그런 설정들은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어물쩍 넘어가고 알지 못하더라도 작품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특정 국가의 전통문화라는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더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설사 알지 못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또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불친절함의 장점’은 조금 다르지만, 주제 방면에서도 작용하는데 각 인물과 소재가 상징하는 요소들을 깊게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비교적 표면으로 직접 드러나는 주인공의 트라우마 극복 서사와 사랑 이야기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작고 뚱뚱한 브라운관 TV로 뉴스 보도를 봤던 일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집과 차량, 나무들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가고, 그것들이 물 위에 부유하며 불까지 붙어있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물 위에 불이 떠 있다는 상황이 꽤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보고 약간 공포를 느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원래 살던 곳을 떠나와 대한민국의 남쪽에 살고 있는데, 아직 혹시 모를 지진이나 태풍피해를 특히 걱정한다.
그런 약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동일본 지진 당시 감정을 아직 기억하는 나로서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상당히 가슴에 와닿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본 이후에 각 소재들이 상징하는 바를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메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들은 이 작품을 나와 다르게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그렇게 느끼고만 끝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크고 작은 재난(그것이 자연재해든 개인적인 고통이든)을 겪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힘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세상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녀왔어-어서 와‘ 클리셰를 영원히 답습할 수 있기를.
--------------------------------------------------------------------------------------------------------------
학교 과제로 제출했던 글이라, 한국시장에서 흥행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주제넘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요. 감안해주시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개봉했을 때 보고 너무 감명깊었는데 학교에서 작품 비평문을 작성해야하는 과제가 생겨 신나서 써낸 글입니다.
최근에 재난 3부작이 재개봉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검색으로 좀 뜨려나 싶어서... 업로드를.
또 업로드는 지금 되었지만 실제 작성일은 23-05-29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