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같은 인간이 잡지같은 일을 한다는 것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나'라는 사람의 사용 설명서를 새로고침하곤 한다. 하지만 짧은 자기소개 칸 앞에서 내 펜은 매번 갈 길을 잃는다. 나를 정의해야 하는 수식어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잡지 같은 인간'이라 생각했다. 한 가지 주제로 촘촘하게 쌓아 올린 단행본보다는, 매달 표지가 바뀌고 결이 다른 기사들이 나란히 놓인 잡지.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 그 비유는 칭찬이 아니었다. 매번 다루는 것이 달라서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매체 — 그게 꼭 나 같았다. 영문학, 신문방송학, 그리고 경영학까지. 세 개의 전공은 각자 매력적이었지만, 그 셋을 동시에 안고 있는 나는 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졸업 후의 궤적도 비슷했다. 캐나다에서 유치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돌보다가, 한국에 돌아와서는 통번역을 했고, 때로는 칼럼을 썼다. 돌고 돌아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마음 한구석에는 늘 서늘한 질문 하나가 따라붙었다. 나는 왜 무엇 하나 진득하게 파고들지 못할까.
지금 하는 일에서 그 파편들이 전부 쓰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영어는 해외 아티스트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신문방송학은 콘텐츠의 맥락을 읽는 눈에서, 경영학은 이 산업의 구조를 이해하는 토대에서. 돌아보면 의미 없는 시간은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믿기까지가 오래 걸렸을 뿐이다. '나따위가 감히'라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기회의 문 앞에서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던 날들이 있다.
잡지가 어때서. 전공 서적만이 깊은 것은 아니다. 잡지는 넓은 시야 안에서 결이 다른 것들을 나란히 놓을 줄 알고, 그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매번 달라지는 것이 일관성의 부재가 아니라, 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하나의 흐름을 꿰는 것 자체가 잡지의 일관성이다. 하나를 깊이 파는 것과 여러 조각을 하나의 선으로 엮는 것은 다른 종류의 능력이지,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는 지금 매체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다. 잡지 같은 인간이 잡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이야기를 여기서 닫으면 거짓말이 된다.
나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결을 다루는 데 좀 더 수월한 사람이다. (아쉬운 일이지만)아주 힙하거나 날이 선 하이패션의 언어는 나의 주특기가 아니다. 한동안은 그것이 명확한 한계라고 생각했다. 색이 뾰족하고, "이 느낌은 이 사람"이라는 인장을 가진 크리에이터들을 볼 때면 오래된 문장이 돌아왔다.
"나는 왜 저렇게 뾰족하지 못할까."
어느 순간부터 방법을 바꿨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메우는 대신, 그걸 잘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내가 깔아놓은 보드라운 화지 위에 타인의 날카로운 획을 얹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가장 매거진스러운 방식이다. 잡지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이 다른 사람들의 개성을 한 권 안에 모아 흐름을 만드는 것 — 나는 결국 잡지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낸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의 선명한 뾰족함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은 불쑥 찾아온다. 장점이라 믿었던 것이 고개를 돌리면 단점이 되고, 단점이라 여겼던 것이 시간이 지나 장점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 경계는 아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한 줄로 소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끔은 그 칸 앞에서 또 멈칫하며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다만 이제는 그 멈칫거림을 알아챌 줄 안다. 흔들리는 나를 알아채는 것 —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나에게 작은 응원 하나쯤은 보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