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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의미 Aug 11. 2019

병든 철학자 한병철을 고발합니다

피곤하냐? 나도 피곤하다.(feat. 『피로사회』)

세상 들여보기


지금은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시대. 새로이 불어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무는 패러다임은 ‘자기 경영의 시대’다. 우리가 모두 스스로 자신을 경영한다고 말한다. 새 바람에 편승한 세계의 헤게모니 다툼은 교묘하고 은밀한 힘의 질서를 세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힘의 줄다리기는 다양한 시점 속에 존재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 그리고 각 국가들 내부 모두에서 펼쳐진다. 근대의 국가는 자본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나, 이제는 자본 또한 자기가 속한 국가권력을 감시하며 상호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는 자본이 곧 기득권임을 자처하며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갖가지 병폐와 마주한다. 맑스가 예언하다시피 말했듯 노동의 가치가 바닥을 치기 때문일까.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우리가 병든 사회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병든 사회 속의 우리 또한 매우 당연히 병들었다. 그는 상당수의 철학자를 동원하며 이 글을 구성한다. 여러 철학자의 이야기를 짜깁기하며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가장 교묘한 방식이다. 사상가들의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드러나는 메시지는 분명 선명하다. 이는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식이다. 본인의 이야기보다는 거인의 유산을 더 부각하면서, 가장 쉽게 확실한 한 마디를 남긴다. 이는 자칫하면 누더기가 될 수 있는 형식이지만, 저자의 성공을 보건대 그의 기술은 완연한 색동저고리를 만들어낸 듯하다.



세상 즐기기


현대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흘러간다. 어느덧 푸코가 고발한 규율 사회를 벗어난 우리는 이제 스스로 통제한다. 이른바 성과사회의 시작이다. 성과사회는 바쁘다. 바쁜 것 외에도 특별한 점이 또 하나 눈에 띄는데, 바로 능동성이 그것이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누군가의 폭력성에 휘말리는 수동적 객체로서 존재했다. 하이데꺼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정된 삶에 내던져진 셈이다. 이제는 능동적으로 또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분류하며 판단한다. 자기 자신조차도 당연히 그 대상에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포스트모더니즘-게임에 점차 빠져든다. 사실 빠져든다는 그 어떤 자각조차 없이 이미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위한, 그러나 할당된 적은 결코 없는, 끊임없는 임무를 강제로 즐기기 시작한다. 대가는 달다. 더 큰 대가를 위한 경쟁은 다분히도 필연적이다. 그럴수록 중독 증세는 나날이 심해진다. 스스로 채찍질하며 더 큰 성과를 위해 매진한다. 쉴 새 없이 내달리며 보이지 않는 마지막을 향한다. 그 끝은 어디일까?

서울시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30대까지는 자살이 1위다. 당연하게도 OECD 내 1위다. 우리네가 늘 그렇게 얘기하듯 안 좋은 건 다 1등에 좋은 건 다 꼴찌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40대 이후로는 암이 1위다. 해학깨나 하는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못 버티면 자살하고 버티면 암으로 죽는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는 스스로 긍정하며 내달리기 일쑤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이는 공연히 패자가 된 셈이다. 눈총 받아 싼 인물이 되어도 불평하지 못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 이 세상, 패자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낙오자들이 살아내기에 이 세상은 그다지 녹록지만은 않아 보인다.



너와 나의 매트릭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도 빠른 나머지 이를 따라가지 못한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가끔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풍요를 만나 보장된 삶을 살면서 무얼 그리 걱정하고 있느냐고. 우리의 삶은 성실이 모든 것을 보장하는 유토피아라고. 불평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대체 그들이 택할 약은 빨강과 파랑 중 어떤 색일까?

답을 정한 뒤 문제를 따져서일까? 그들이 제시하는 청사진은 결코 푸르지만은 못한 듯싶다. 스스로 자신을 의심할 수는 없는 비판이라서일까? 이 비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스스로 비판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 격의 태도에서 나온 걸까? 분명 저들의 낙관주의는 열정 페이로 대변되는 사회문제와 충돌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미생들은 스스로 ‘호구’라 자칭하지 않던가. 인간의 가치는 감춰지며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버려지고 교체당한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 따지는 것은 뒤로 하고서라도, 먼저 고민해볼 문제는 과연 우리가 마땅히 따져야 할 일을 적절히 따지고 있느냐다.

한병철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한국 사회는 급성장하여 건전한 비판 정신을 배울 시간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책을 통해 비판의식이 피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과연 이 비판이란 것은 무엇인가? 무작정 따지고 들면 다 비판이 되는 것일까? 일단 노력을 강조하는 이들은 우리 사회를 과거와 비교해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아무리 땀 흘려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굶주리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다. 이는 과연 건전한 비판일까? 존 스튜어트 밀은 이에 대해 현명한 답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보다 낫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배부른 바보가 되는 것보다 낫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노력이 담보하는 것은 고작 물질에 불과하지 않던가. 돈이 보장하는 즐거움이 어디까지던가? 고상한 비판이라면 그 점을 먼저 따져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상 속 고립


현대 사회는 우울하다. 세상은 자본을 내세워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했고, 동시에 광활할 만큼 거대해졌다. 이와 함께 개인은 각기 제 나름의 독립적인 삶을 쟁취했다. 모두 이렇게 저렇게 흩어졌다. 각자의 영역에 몰두하며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레 고립됐다. 고립은 금세 외로움을 부른다. 어쩌면 이 외로움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인지 모른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기엔 가장 가까운 손조차 충분히 멀다.

사회적 고립은 우울의 심각한 충분조건이다. 어쩌면 우울증이 고립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끝없는 악의 순환을 되풀이하는 건지도 모른다. 음의 창발이요, 재앙의 시작이다. 이런 사회라면, 폭력과 약물 중독에 빠지는 것도 대단치 않은 일이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가까운 손’을 필요로 하며, 그것의 중요성을 단번에 매우 직관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한병철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손들의 위로와 연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나마도 담담하게 중립적으로 서술한다. 독서에서마저 고립된 현대인들에게는 눈치채기 힘들 정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나친 낙관에 병든 나만이 읽어낸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도 주된 메시지는 비판의식 함양을 통한 자아성찰 달성에 초점을 뒀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 독서를 매개로 한 극약처방은 과연 어떤 효과를 부를 수 있을까?



『피로사회』속 세상


단언컨대, 이 책의 존재는 철학이 병든 증거다. 철학은 사유하는 학문이다. 인간은 사유를, 그 자체를 즐기는 지적 생명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성의 동물인 인간은 존재하는 동안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사유하며, 그동안 계속해 재미를 추구한다. 이는 별수 없는 우리의 본능이자 본성이다. 삶을 고통으로 보는 불교조차도 그 고통을 근원적으로 끊어내길 바라지 않던가. 고통을 끊어내는 방법은 즐거워야만 한다. 사유를 즐기지 못한다면, 이는 곧 인간으로서의 도태를 의미한다. 자연에서 도태는 당연히 죽음으로 이어진다. 한병철은 즐기지 못할 인간이 살아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그마저 아주 비관적으로 그려낸다.

포스트모던 이래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를 고발했다. 그들은 사유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사회를 비판했다. 한병철은 다르다. 그의 저작 속에선 인간이 사유하기 때문에 불행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매우 부당하며,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확증편향이다. 사유의 영역에 한정된 사회적 장애조차 극복하지 못할 사유 능력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간에게 있어 낙오하는 사유 능력은 자연적인 도태이며, 이는 죽음으로써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나머지가 잘 살면 그만이다. 다시 말해 사는 이들만 잘 살면 그만이다. 우리는 죽은 이들과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지만, 이는 사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한 것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유가 빠진 탐닉은 병이다. 우리는 매우 자주 방송을 접하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때조차, 특히 뉴스를 접할 때, 우리는 비난한다. 정부를 욕한다. 그따위 것은 방송할 필요조차 없다. 욕하면 뭐할 텐가? 이 부정 속에는 긍정이 빠졌다. 우리는 욕하는 것마저 즐겨야 한다. 순수한 분노는 카타르시스로써 우리의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고 소모하게 해 주지만, 어쩌면 우리의 발목만을 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비판하며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책임 있는 뉴스라면 미래를 그리는 푸른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울한 가장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역시 방송을 통해서다. 이는 그나마도 조금은 낫다. 울어야 할 이들을 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그쳐서는 결코 안 된다. 동병상련을 통해 운 뒤에는 이제 대안이 남아야 한다. 아니면 일회성에 그친다. 일회성의 소비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뒤가 없는 인간은 암울할 뿐이고, 택할 것은 자살뿐이다. 대안을 보여주지 않는 방송은 그래서 쓰레기다. 전쟁도 아닌데 배수진을 쳐야 할 이유가 뭔가?

한병철은 나쁘다. 현대인이 배수진을 친 채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자유다. 이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이 책엔 인간의 행복한 미래가 당최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진단하는 기술자는 도처에 널렸다. 이는 택시만 타도 증명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보여줄 초인이다. 정부를 욕하는 이들과 한병철은 다를 게 없다. 한병철이 묘사한 현대인들이 그토록 지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에게 좀 더 따스한 손길을 건넬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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