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얼마 전부터 할머니가 제목에 들어간 책이 유행처럼 쏟아졌는데, 딱히 크게 기억에 남는 책이 없다. 그래서 이 책도 그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담아 쓴 에세이겠지' 생각하고 지나쳤다가, 최근에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심윤경 작가의 작품에 깊이 빠져 그녀의 문장이라면 서점에 즐비한 다른 할머니 책들과는 분명 다를거라 기대하고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안 읽고 넘겨서는 안될 책이었다. 책에도 시절인연이란 게 있다던 마운틴구구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지금의 내가 반드시 만났어야 하는, 놓을 수 없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은 '육아서'로 분류되지 않는데도 가장 아름다운 육아서일지 모르겠다.
제목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지만, 할머니에 대한 기억만 주루룩 이어지지는 않는다. 중심은 심윤경 작가가 그녀의 딸 꿀짱아(애칭)를 기르면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힘겹게 성장해가는 일상에 있다. 한 명의 인간을 온전한 성인으로 길러내는 일은 양육자 스스로의 끈기 있는 자기 수양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전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에 은근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어 있던 할머니의 온기를 느낀다. 그 온기는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은근한 것인데도, 때로 휑하게 속이 허한 날 쓰린 가슴을 달래주고 때로 화가 치밀어 몸도 머리도 과열된 어느 날 평온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의 적정 온도로 열을 낮춰준다. 죽으면 천국이고 지옥이고 다 쓸데없다고, 죽으면 그냥 끝이라던 할머니의 온기는 그녀의 손녀가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내느라 부단히 애를 쓸 때에도 꺼지지 않았다.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가 아닌 것처럼 할머니라고 다 같은 할머니일 수 없다. 그녀는 서문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공익적으로 마음이 아프다. 인류는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라고까지 말하는데, 책을 다 읽고나면 그녀의 할머니만이 가진 특별함을 책으로나마 나누어 받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답답할 만큼 말수가 적고 놀라울 만큼 감정 기복이 거의 없으시던 그녀의 할머니는 감탄사 같은 몇 마디 말들로 기억된다.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 그리고 '저런'까지 작가는 이 여섯 가지 단어를 사랑의 말로 정리했다. 무심한 듯하지만 함께있는 이를 언제나 편안하게 하는 사랑의 말. 저마다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개인 방송까지 해대는 요즘, 심윤경 작가가 그녀의 문장으로 할머니 이야기를 남겨놓은 건 공익적으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주어진 짧지만 가장 평온한 노년 시절만을 함께한 작가는 뒤늦게 할머니의 삶이 참으로 녹록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할머니에게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집을 전전했던 어린시절이 있었음을, 호된 시집살이를 겪으면서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가슴에 한이 맺힌 젊은 엄마로서의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자주 쓰곤 했던 몆 개의 단어들은 어쩌면 그 긴 세월의 고단함 속에서 할머니 스스로를 지켜준 감정의 방패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또는 응어리진 아픔이 굳은 살처럼 굳어진 알맹이가 툭툭 떨어져나오는 건 아닐까.
이제 고작 7개월 된 아기를 키우면서 어떻게든 좋은 엄마가 되어 성공적인 육아를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지금, 심윤경 작가와 그녀의 기억 속 할머니로부터 더없이 솔직하고 친절한 위로와 조언을 얻은 기분이다. 그녀의 할머니가 그저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장혀' 한 마디로 토닥여주시는 것 같다. 어린시절 나와 늘 함께였던 나의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밤이다. 아직은 할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109쪽)
사람의 늙어감이 추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저 조촐해져가는 것임을 나는 안다. 가진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오로지 소리없는 함박웃음만으로 나의 남은 존재를 채워가는 것,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길이었다. (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