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이 책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 정의하지 못하겠다.
세 여자의 기구한 인생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국의 근현대사 시대를 담았다고 해야 할지,
몽환적인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토속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이 모든 표현으로도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사실은 이 책은 한 번 펼치면 빨려 들어가듯 읽을 수 있어 꽤 긴 책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읽는다. 그 이유는 아마 작가의 글솜씨에 있다고 자부한다.
인물의 행동과 모습을 묘사하는 디테일부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과정까지 흥미로우면서 복잡하지 않다. 쉽게 읽히면서도 중간중간 앞의 내용을 떠올리며 복선을 찾는 것이 꽤 재미있다.
하지만 조금 불편한 부분도 있었는데,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다. 처음엔 그다지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나중에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 작가의 의도가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 있구나 느껴졌다. 그래서 작가의 해석대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해석만 얘기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훌륭한 사업 수완과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자 금복,
그리고 말을 못 하는 그의 딸 춘희,
마지막으로 그 지역에서 국밥집을 하던 한 노파
이렇게 시대별로 세 여자가 얽힌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세 여자의 인생사를 그린 책의 이름이 왜 '고래'일까.
나는 고래를 금복이의 거대한 야망 그리고 춘희의 생명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금복은 어렸을 때부터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꿈이 컸다. 자신이 살던 동네를 벗어나 큰 바닷가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고래를 보았다. 그 뒤로 금복이는 땅을 사들여 장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영화관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고, 벽돌공장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공시켰다.
또래 여자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수완을 가지고 있었으며 배포 또한 웬만한 남자보다 컸다.
고래는 금복이의 커다란 야망과 그걸 진행시키는 추진력을 묘사하기 적합한 생명체였다.
춘희는 금복이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아주 크게 태어난다. 비록 말을 하지 못하고 상황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잘 읽지 못하지만, 춘희의 생명력만큼은 대단했다. 덕분에 금복이의 벽돌공장에서도 사내보다 더 나은 일꾼이 된다. 하지만 춘희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 과정에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아주 좋은 친구였던 코끼리 점보도 세상을 떠나고, 감옥에서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고 그 후에 감옥을 나오고 나서 인생까지도 모두 춘희에게는 험난하고 지치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내는 춘희의 생명력. 그것을 묘사하기에도 고래는 적합한 생명체였다.
*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죽음이란 건 별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 사람들과 그 일상을 보내는 것에 무뎌지지 않도록 감사하는 그런 일들이 아마도 먼지를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행동하는 대로 내가 된다.
나를 바꾸어야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렵게 느껴진다. '나'를 어떻게 바꿔. 나는 난데.
그런데 행동을 바꾸면 내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내가 바뀌고자 하는 방향대로 하나라도 더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을 점차 쌓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바꾸는 방법인 것이다.
혹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가졌든지 간에, 행동하는 대로 보이고 기억된다.
그러니 남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
이 책에서 금복은 벽돌공장에 매달린다. 벽돌 공장을 지을 때는 돈도 많이 들고, 심지어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끊임없이 부딪히는 장애물에도 금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벽돌공장을 성공시킨다.
금복이 아무리 큰 야망과 훌륭한 사업수완을 가졌더라도, 중간에 벽돌공장을 포기하고 성공시키지 못했더라면 사람들은 금복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헛된 꿈만 꾸다가 돈 날린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복의 포기하지 않고 야망을 향해 도전해 가는 그 행동이 금복을 만든 것이다.
*
'하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어'
이 말은 코끼리 점보가 죽고 싶어 하는 춘희에게 해주는 말이다.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다. 정말 그럴까 의문을 가질 때가 있었다. 특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볼 때면, 정말 죽는 게 나은가 싶을 정도의 삶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삶이 죽음보다 나은 점은, 하나라도 더 행동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노력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희망이 없는 움직임 같아도, 그 움직임이 모여 언젠가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나갈 힘이 있다는 것.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누군가 내게 다가올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다가가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의 어느 부분이었는지 사진을 찍어놓지 않아 정확히 기억나는 구절은 아니지만,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죽는다는 건 헤어진다는 것(잊힌다는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라진다는 거야'
이런 내용이었나.
이 문구를 보자마자,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이유는 헤어진다는 것 (잊힌다는 것)일까 사라진다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이 두려운 건지, 아니면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잊히고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인지.
아마 나에게 있어서는 헤어지는 것이 더 두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