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이가 생후 9개월이 되는 무렵,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돌까지는 내가 직접 아이를 키울 생각이었는데 우연찮게 집과 가까운 곳에서 주 3일 근무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들어왔다. 주 3일이라니! 아이도 적잖게 돌보고 경력도 이을 수 있으니 이상적인 근무 형태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완전한 워킹맘도, 완전한 전업맘도 아닌 '반워킹맘'이 되었다. 일하는 날 아이는 시댁에서 봐주시기로 했다. 어린이집이나 베이비시터보단 안심이지만 그동안 아이와 찰떡같이 붙어 생활하다 종일 떨어져서 있으려니 괜히 내가 더 안달복달 노심초사였다. 정작 퇴근해서 데리러 가면 보석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방긋거리고 있었다.
3일만 출근하고 나머지 날들은 평소처럼 아이와 부대끼며 보내니 워킹맘과 전업맘의 장, 단점을 전부 체감할 수 있다. 여러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순수하게 나 자신, 내 몸뚱이만 생각하면 육아보단 직장생활이 단연 수월하다. (모든 직종이 그렇지는 않겠고, 나는 편한 일자리를 찾아갔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다.)
이웃 아기 엄마가 일하니 어떠냐고 물었을 때, 육아 장거리 달리기 중인 사람에게는 자랑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출근하는 날이 집에 있는 날보다 편하다는 솔직한 심정을 말해주었다. 어쨌든 오후 12시 반이 되면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할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커피도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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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는 날은 솔직히 사람 사는 듯이 산다. 일단 내 자리라 할 수 있는 곳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다이어리에 할 일을 적고 지워 나갈 수 있는 게 좋다. 9개월 동안 엉망으로 가득 찬 창고를 깨끗하게 정돈한 기분이었다. 막간의 휴식 시간에 가전제품 A/S 문의, 은행 업무 및 핸드폰 요금제 변경 등 몇 개월 동안 하지 못하고 미루던 일들을 처리했다. 점심시간에는 잠깐 차를 가지고 나가 타이어에 바람을 넣었고, 카톡 프로필을 보다가 그리운 이에게 연락하는 호사도 누렸다.
남들처럼 아침에 머리 감고 화장하고 집을 나서 어디론가 출근하고 시간이 다 되면 퇴근을 하는 삶, 오후 12시 반마다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할 수 있는 삶이 이토록 안정감을 주는 줄 몰랐다. 일이 쌓여 몹시 바쁠 때도 있지만 몰아치고 나면 틀림없이 쉴 시간이 주어진다. 나의 수고에 금전적 보상이 분명히 주어지고, 결과에 따라 인정과 칭찬이 따라오기도 한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도 있지만 열심히 방법을 찾아보고 직장 동료들과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는, 평범하고 익숙한 삶이다.
그런데 몇 개월 간 고립된 환경에서 지내다가 다니기 시작한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만족스러워서일까, 육아를 피하기 위해 직장에 다니기로 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자꾸 나를 따라다닌다. 여러 근무 조건이 괜찮은 기회였기 때문에 결심을 내린 것이지만 혹시 나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라도, 육아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동기가 작용했는지 끊임없이 자신을 추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나를 따라다니는 걸로 모자라, 다른 이들의 얼굴에 덧씌워져 사소한 표정 변화에도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내가 아이를 돌보던 시간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된 남편과 시부모님이 힘들어하지는 않은지 눈치를 보게 되고, 혹여나 힘들다는 내색이 보이면 한동안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아직 애가 어린데 굳이 일을 시작해야 했냐고 나를 흉보고 있지 않을지 괜한 안테나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육아를 아주 못 견디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과장 좀 섞어 "의외로 나 육아 체질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힘든 순간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많았고, 경이로운 아이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또 육아는 결코 단순노동이 아니어서, 조금씩 능숙한 엄마가 되어간다는 데 성취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숨이 막혔다. 늘 발뒤꿈치를 들고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던 신생아 시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9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내 몸뚱이 하나 씻을 시간을 내려면 요령이 필요하고 집 앞 슈퍼에 나가는 것조차 호락호락하지 않다. 퇴근이라는 게 없이 365일 제1 책임자로 대기해야 하고, 치과 치료 같은 볼 일을 보려 해도 남편이나 다른 누군가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아기 없이 혼자 개인적인 약속을 잡는 건 꿈도 못 꾼다.
내 대신 8시간씩 주 3일 육아를 해 주는 이들이 힘들지 않은지에 촉각을 기울이다 보니, 그동안 24시간 주 7일 육아를 전담하던 나는 과연 괜찮았나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실은 괜찮지 않으면서, ‘엄마’니까 마땅히 해야 한다고 괜찮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강요했던 건 아니었는지.
여기까지 글을 쓰고 한동안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읽을수록 '나는 육아를 피하려고 직장에 다시 나가는 게 아니다'는 말에 분명 강세가 있다. 만약 피한 게 맞다면? 피하면 안 되는 건가? 피하고 싶지 않았다면 어떤 해결을 원했던 걸까?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육아에 드는 힘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직장생활을 결심하도록 일조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아이를 직접 돌보고 싶다는 엄마의 책임감만큼이나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도 절실했다. 하지만 돌전 아기의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의 생활로는 아무리 잠을 줄여도 시간의 한계가 있었다. 남편이나 친정, 시댁에 '나만의 시간'을 갖게 도와 달라 요청하기는 쉽지 않고 그렇다고 어린이집을 보내거나 베이비시터를 쓸 용기도 나지 않았다.
직장에 다시 나가는 것은 나만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굳이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설득하지 않아도 육아를 분담하도록 자신과 가족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돌아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 지금까지 나는 내가 육아를 힘들어하고, 누군가와 부담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그런 이기적인 이유로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나를 변호해왔던 게 분명하다. 실상 아무도 내게 뭐라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를 추궁하고 변호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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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카페에 갈까 하다가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가 아까워 건물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즐비한 식당 사이로 하얀색 건물의 '작은 도서관'을 발견했다. 사용할 수 있는 건지 몰라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규모는 작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도서관이다. 두 세 사람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고, 비치된 책 대부분은 새 책이다. 나는 아무 책이나 한 권 뽑아 들고 책상에 앉아 평화로이 이 글을 마무리짓는다.
그렇게 아득한 시간을 보내다 재미있어 보이는 신간 한 권을 빌려 도서관 밖으로 나오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시끄러운 식당가가 펼쳐졌다. 나만 아는 비밀의 문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나를 감싸며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나만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고,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