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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Aug 17. 2020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육아와 사색_42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

   

 보석이가 심한 설사를 한 지 닷새쯤 되었다. 기관지염이 먼저 있어 항생제를 오래 먹었는데, 그게 장염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꽤 오랫동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설사만 줄줄 하니 얼굴이 갸름해지고 그 볼록하던 배가 편평해졌다. 이러다 입원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애간장이 탔다. 마침 어린이집 방학이라 내가 일하는 날에는 보석이가 시댁과 친정을 전전해야 했는데, 양쪽 어르신들 나름대로 설사의 원인 분석과 해결책 강구에 응대하는 것도 일이었다.


 오늘은 좀 낫겠지 하고 기다려봐도 먹는 대로 아랫도리에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결국 엉덩이 발진이 쫙 깔렸다. 엉덩이를 닦을 때마다 "아파! 아파!"하고 울부짖으니 정말 나도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다. 엉덩이에 묻은 설사변을 물로 조심스레 닦아낸 후 발진크림을 바르고 기저귀를 채워지만 금방 또 '찍'하고 물 같은 설사를 지리니 도대체 엉덩이가 배겨 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설사와 엉덩이를 상대로 치르는 이 전쟁도 보석이가 잠들면 일시 중지다. 지친 몸으로 보석이를 재우다 나도 살짝 잠이 들었는데, 보석이가 제 몸을 벅벅 긁는 소리에 금방 잠이 깼다. 엉덩이가 가려운지 기저귀 속으로 손을 넣어 자꾸 긁는 것이다. 몇 번은 대수롭지 않게 옷을 덮어주고, 아이가 완전히 잠들면 나가서 집안일도 하고 글도 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뒤척거리며 엉덩이를 긁어댔다. 중간에 수딩젤을 발라주고 대신 긁어주기도 했지만 계속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벌떡 앉더니 눈을 감은 채로 "엄마!"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뭔가 괴로운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불을 켜고 기저귀를 열어보았다. 세상에, 얼마나 긁었는지 여러 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수딩젤을 발라주려고 했는데 바르면 안 될 만큼 상처가 나 있었다. 내 마음의 살점도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엉덩이에 바람을 쐬어주고, 손이 들어가지 못하는 수면조끼로 바꿔 입힌 후 긁으면 안 된다고 속삭이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관지염이고 장염이고 기저귀 발진이고 찰과상이고, 사실 심각한 질병은 하나도 없다. 언젠가는 후유증도 없이 사라질 증상들이란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자는 듯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 이렇게 내가 해줄 게 없는 상황일 때, 속이 더 타들어 가곤 한다.


 1년 전쯤, '자신의 욕구를 다 채워주는 전자동 시스템, 엄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보석이'에 대한 글을 썼다. 엄마가 된 기쁨 중 단연 최고의 기쁨은 내가 이 한 생명에게 넉넉히 채워줄 게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배고프거나 졸릴 때 아이가 엄마인 내게 울며 매달리면 나는 그 고통을 해소해 준다. 지루하거나 짜증이 날 때도 내게 하소연하면 나는 재미있게,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다. 가끔 아빠가 그런 역할을 하려 하면 보석이는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거부하고 내게 달려온다.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가끔은 그런 유일무이한 내 존재가 뿌듯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보석이가 아플 때 나는 더 이상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병원에 데려가고, 보양식을 제공하며 극진한 간호를 한다 해도 보석이의 병은 내 뜻대로 낫지 않는다. 엄마에게 가면 뭔가 해결이 있을 거라 믿고 칭얼대는 아이를 그저 꼭 끌어안고 "가엽구나, 가엽구나."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Photo by Anna Shvets from Pexels


 사실 중한 병을 앓고 있거나 약한 체질을 타고나 병원에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아이와 그의 엄마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정말 송구한 고백이다. 보석이는 돌 무렵 겪은 열 경련이 가장 큰 이벤트였는데, 응급실로 가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속이 타들어간다는 건 과장이다. 설사병으로 잠을 못 이루는 정도라면 속이 타들어간다기 보단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표현 정도가 어울릴 것이다.


 시어머니는 애가 아프면 엄마 마음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며 늘 도련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도련님은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오래 지냈고, 이후로도 아프지 않을 때가 없이 종합병원을 계속 드나들었다고 한다. 차도 없던 시절, 대여섯 살 먹은 남편을 한 손에 붙잡고 도련님을 등에 업은 채, 버스를 타고 수차례 병원을 오가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진심으로 "얼마나 힘드셨어요."라고 탄식하게 된다. 아직은 보석이가 특별한 질환을 갖고 있지 않지만 자라면서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덜컥거리고, 버텨낼 수 있을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이전의 나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라는 문구가 부모들이 뻔히 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짓말까지는 아니라도 공부를 잘했으면, 성격이 둥글었으면, 인생이 잘 풀렸으면 하는 여러 소망을 감춘 상투적인 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꼭 그렇다. 보석이가 공부 잘하기를, 키 크고 외모도 잘 나기를,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격이기를,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를 꿈꿔보기도 하지만, 건강하지 않다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하찮은 옵션에 불과할 뿐이다.


 육아 에세이를 쓰다 보면 늘 비슷하게 끝나는 경향이 있는데, 내 부모님의 마음도 그리했을 것이라는 게 이제야 짐작이 간다. 자식이 여러 방면에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아파하는 그 순간에, 병원에 입원하여 온갖 줄을 주렁주렁 달고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 자식의 건강 외에 다른 것들은 모래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최고의 효도는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자식이 되는 게 아니라, 아프지 않은 것이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나와 보석이를 위한 영양죽을 쑤어야겠다. 아이를 돌보고, 동시에 아이를 돌보는 나를 돌보며 다난한 여정을 넘기고 산다. 아이의 머리털 한 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지만, 정말 어딘가 다쳐 온다면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아이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게 엄마의 임무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상처 난 엉덩이는 잠시 잊어버리고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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