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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Nov 22. 2020

다림질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다림질을 해본 적이 없다. 21세기에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한 번도 안 해본 집안일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다림질은 왠지 정이 안 가는 집안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다림질을 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요령은 다 부렸다. 스팀다리미가 나오기 전이었기에 다리미를 사용해야만 했다. 세탁소를 이용할 법도 했지만, 매일 입는 교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찾아올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스팀다리미가 출시된 이후로 스팀다리미를 사서 몇 번 써봤지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셔츠를 옷걸이에 걸고 구석구석을 뜨거운 증기를 씌워줘야 하는 상황이 여간 못마땅했다. 누가 나를 씻겨서 널어놓고 온몸 구석구석을 말려주는 것만 같았다. 날 선 전투복과 광나는 전투화가 가오라고 여겼던 군대에서도 다림질은 안 했던 나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갔다.


퇴사를 하고 나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외출을 하다 보니 더 이상 빳빳한 셔츠를 입을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나에게 더 이상 다림질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 입을 옷을 고르는데 어울리는 셔츠가 구깃구깃해서 영 보기 싫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큰 맘먹고 먼지 쌓인 다리미를 꺼냈다. 바닥에 모포 같은 이불을 깔고, 셔츠를 잘 펼쳐 놓았다. 분무기가 없어 대접에 물을 반쯤 담아 왔다. 대접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빼서 옷 위에서 몇 번 튀긴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를 들고 구겨진 옷 위에 올려놓는다. 힘주어 앞뒤로, 옆으로 셔츠 구석구석 다림질을 한다. 다리미가 지나갔던 곳은 뜨거운 열기와 함께 주름이 빳빳하게 펴지고 없다.


이제는 거의 하지 않는 다리미질의 쾌감을 요즘에서야 알았다. 스팀다리미에 걸어놓기만 하면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스타일러스까지 나왔지만, 꾹꾹 눌러 다리는 다리미가 보여주는 산뜻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세탁소 아저씨는 매일 옷을 다리면서 이런 통쾌함을 느낄까? 펴지는 주름만큼 꼬깃꼬깃한 마음도 펴지는 것 같다.


이런 산뜻함을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도 귀찮고 싫었던 다림질이 요즘에는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 준다. 이런 소중함은 매번 너무 늦게 알게 된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되다가도, '예전에는 왜 이걸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학창 시절 끝을 모르는 방황이 지긋지긋했고, 매일 같은 듯 다른 일들로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 일주일이 지겨웠다. 배불러 더는 못 먹겠다 말하는 내 접시에 더 먹으라고 올려주셨던 할머니의 사랑은 더는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깨달았고, 말없이 무뚝뚝하시기만 하셨던 할아버지의 자리도 허전함을 메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무게를 알았다.


언젠가 부모님이 내 옆에 안 계실 때, 나는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될까? 아주 오래된 가요의 가사처럼 나도 땅을 치며 통곡할까? 있을 때 더 잘할 걸 하며 충분히 잘하지 못했던 오늘을 후회할까?


때로는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나의 우둔함이 원망스럽다. 일상에서 문뜩 알게 되는 작은 소중함에 감사하다가도 더는 소용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려야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음에 겁이 나다가도 그 소중함이 있기에 내가 다시 그날의 소중함을 떠올릴 수 있음에 눈물이 핑 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내몰라라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옵고

산소에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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