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그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갑자기 축구를 공부하고 싶다며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저 축구에만 정신을 팔려 공부는 뒷전인 그의 학교 성적은 300명 중 200등이었다. 더욱이 수학과 과학은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뇌를 닫아 버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미친 듯이 몰입하고 싫어하는 것은 거들떠보지 않는 아이라 한국 교육과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분명 머리가 나쁘거나 바보는 아닌데 이런 식으로 학년이 올라가다가는 점점 성적이 떨어져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행복하지 않은 아이가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유학을 간다고 하니 수학이 어렵고 중요한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외국에서 공부하면 잘하는 것에 더 몰입할 수 있겠다 싶어서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그는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 열다섯에 혈혈단신 피붙이도, 하다못해 지인도 하나 없는 영국 땅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다음 학기를 준비하기 전 짧으면 2주, 길면 3개월의 방학 때만 한국에 돌아와서 머물다 갈 뿐. 집은 그에게 떠나기 위해 머물렀다 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마지막 학년을 하기 위해 출국한 아이가 2주 만에 소식도 없이 귀국했다. 영국 대학은 3년 제인데 2학년 과정에서 점수가 부족해 재수강 판정이 난 과목을, 방학을 이용해 계절학기로 하고 귀국했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않고 그냥 귀국해 버려서 2학년 낙제를 하여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여름 계절학기를 해야 3학년에 올라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정치가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마침 그해 지방선거가 있었고 6월부터 후보자 수행비서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터라 그 일이 너무 하고 싶었던 나머지 2학년 뒷마무리를 하지 않은 채 입국해 발생한 일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1년을 쉴 필요 없이 당장 군에 입대할 것을 ‘명령’했다.
평소에 졸업하고 군에 가겠다고 버티던 그는 이번에는 자기도 면목이 없는지 순순히 군에 자원을 하여 입대를 했다. 그리고는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나에게 거대한 폭탄을 하나 투하했다. 그건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는 선언이었다. 헐.
그의 나이 열여덟에 나는 과부가 되었고 그는 애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가장이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고 그와 나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가 빠져나가고 없는 세상은 마치 추운 겨울에 바람 한 점 피할 데 없는 들판에 얼어붙어 있는 수수깡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은 냉혹했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는 학업을 계속했고 나는 그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다. 그렇게 온 마음이 메말라 가슴에서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데도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대학 졸업까지 7년의 유학기간 중에 이제 딱 1년만 더 하면 졸업인데. 거기서 멈추겠다는 거였다.
의외로 나는 담담했다. 내가 부귀영화를 보려고 공부시킨 것도 아니었고 본인이 가겠다고 간 유학인데 본인이 그만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공부를 억지로 시키나. 나이가 원투쓰리도 아니고 스물네 살이나 드신 성인인데. 이제 내가 그의 인생을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선택이니 존중해주자 했다. 애초부터 치사하고 품위 없게 본전 타령은 하지도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무조건 응원만 해주자. 따뜻하게 품어만 주자. 채근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려 주자.
드디어 그가 전역을 했다. 그리고 열다섯 이후에 떠나기 위해 머물던 집에 온전히 같이 살기 위해 9년 만에 내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9년 만에 가족으로 다시 합채 한 그와 나의 좌충우돌 적응기를 적으려 한다. 오늘로 같이 산 지 딱 1주일이 되었다. 공유할 추억도 많고 정서도 비슷하고 더더군다나 내 뱃속에서 나온 내 자식이 분명한데 우리가 맞추어가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50대, 그는 혈기왕성 하지만 미생의 청년. 나는 전통 한국인, 그는 사춘기부터 서양 물 먹은 반 웨스턴. 우리의 가족 적응기가 과연 순탄하기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