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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즈 Jun 26. 2022

언어言語가 필요해

공간 기록


중국에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자라온 환경 때문일까?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가득했던 학창 시절. 나는 우연히 중국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어느 여름 방학, 중국의 대련이라는 지역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먹거리도 낯을 가리던가? 중국에서 생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갈이로 인한 배탈이 심하게 났다. 연이은 설사와 복통을 호소하다가 현지 조교의 도움으로 기숙사 근처 죽집을 찾게 된다.



중국어 사전에서 ‘포장'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죽 한 그릇 포장해주세요'라는 어설픈 문장도 챙겼다. 이 문장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식당에 도착했다. 중국어 특유의 높은 성조를 어색한 높낮이로 따라 하며 간신히 죽을 포장한 뒤 그날 저녁 속을 달랜 기억이 난다. 언어로 특정 욕구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체득한 날이었다. 골치 아플 법한 생리적인 현상을 언어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뒤로 그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굶지 않고 생존하기 위하여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필요한 언어를, 기숙사 생필품을 구매할 때 마트에서 필요한 언어를, 방향을 잃지 않고 대중교통을 타기 위해 버스 기사님께 길을 묻는 언어를, 동네 친구를 사귀고자 친근하게 안부 묻는 언어를 익혔다. 그렇게 천천히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결국 우리는 같은 인간인 것을. 왜 좁은 시야와 편견으로 중국인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든 건지.. 오만한 자신을 꾸짖는 계기가 되었다.



남미에서

그리고 이십 대 중반. 영어가 만능 의사소통 도구라고 교육받았던 나는 교과과정을 통해 배운 영어라는 도구 하나만 지닌 채 남미 배낭여행 길에 올랐다. 자기 자신을 책임질 능력이 없으면서 오직 허망한 자유만을 갈망하던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장장 20시간에 가까운 비행이 끝나고 마침내 페루의 리마 공항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영어는 만국 공통어가 아니었음을. 영어는 그저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몇 대륙에서 먹히는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에 불과했음을. 과거 스페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에서 그들이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지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래도 숙소는 쉽게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공항에서 숙소 위치를 검색해 구글 번역기를 돌렸고 페루인에게 길을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그들.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움츠러든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만한 자세로 서툰 영어를 내뱉었다. 먼저 장벽을 세우다니..! 마음의 장벽을 두고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려니 대화도 물론 통하지 않았다. 첫걸음부터 엉망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영어가 세상의 중심 언어인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영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님에도 말이지.



‘왜 영어를 쓰지 않는 거야?’라는 답답함과 같잖은 우월감을 동시에 느꼈을 거다. 이런 일은 어떤 인종을 만나든, 어떤 국가를 여행하든 쉽게 드러나는 고질적인 태도였다.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생존 스페인어를 익혀야 했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기본 회화를 급한 대로 외우기 시작했다. 먹기 위해, 잠을 자기 위해, 와이파이를 사용하기 위해, 이동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언어 너머의 것들

언어와 관련된 몇 차례 사건들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언어는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꽤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나의 세계는 곧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세계와 비례한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어떤 대상을 편견 없이 무해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이 언어이기도 했다. 낯선 외계어로 들리지만 그 안에는 분명 누군가의 삶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필 나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듣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생리적인 욕구 해결을 넘어서 특정 언어에 담긴  사람의,  사회의,  문명의 스토리를 알고 싶어 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했다.





#고요한집

#오즈공간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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