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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곁으로

4주차 과제 - 감각, 자극 글쓰기

by 유연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은 으레 동생이나 엄마 중 누구라도 있기 마련이라 처음 보는 집안의 풍경이 조금은 낯설었다. 느릿느릿 신발을 벗었다. 신발의 밑창과 현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텅 빈 공기를 깨부수는 돌멩이처럼 날카로워서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안방으로 향했다.


불은 꺼져 있고, 커튼마저 빗장이라도 걸어놓은 듯 굳게 닫혀 있던 엄마의 방은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 듯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 한 점 없이 방안은 온통 먹색으로 가득했다.

안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침대 위로 엄마의 실내복이 보였다. 가지런히 벗어두었으나 살짝 흐트러져있는 모양새가 평소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못 견뎌하는 엄마였다. 시력이 너무 좋아도 탈이라며, 엄마는 당신이 가꾸는 집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방바닥에 남은 머리카락이나 발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현관문을 벗어나지 못했던 날들이 떠올라 나는 억지로 웃음을 틀어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엄마가 벗어둔 티셔츠를 끌어당겼다. 엄마의 일상은 늘 무겁고 때때로 눅진했지만, 옷에서는 일상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촘촘한 면의 밀도는 부지런한 엄마의 하루 그 자체였다. 외출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녹두색의 티셔츠는 엄마의 체온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 따스함에 저절로 코를 묻었다. 엄마의 미지근한 체온이 남아있던 목선 가장자리에서 복숭아 같은 달큼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촛불처럼 캄캄하던 방안을 조금씩 환하게 밝히고 낯선 봄바람을 불러오더니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 몇 년 전의 그곳은 한여름의 거실이었다. 나와 엄마, 동생 둘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수영 특강을 다녀온 나는 머리카락에 남아 있던 찬 물기를 선풍기 바람에 의지해 말리는 중이었고, 엄마는 나와 어깨를 맞댄 채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물렁물렁한 복숭아는 칼날이 닿기만 하면 저항 없이 껍질이 돌돌 말려 내려갔고, 달고 물기 어린 복숭아 과즙은 칼날을 타고 뚝뚝 아래로 떨어져 자국을 남겼다. 엄마는 포크로 복숭아를 콕 찍어 나에게 먼저 건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보는 엄마의 눈에는 한낮의 햇살 같은 따뜻함이 어려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면 입을 빠르게 움직이네.” 손이 제법 끈적해져서 얼른 씻어내고 싶을 만도 했을 텐데 엄마는 복숭아를 먹던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달고 끈적했던 그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안은 다시 먹색 어둠에 잠겨 있고, 코 끝에 배인 복숭아 향은 점차 옅어져만 갔다. 솜 이불처럼 포근했던 녹두색 티셔츠는 차츰 엄마의 체온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곧장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고 친구들과 집 근처 벤치에 앉아 놀고 있었다. 마침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아뿔싸, 발신인이 엄마인 걸 확인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황급히 폴더를 열어 귀에 갖다 대자마자 나를 찢어놓을 듯한 신경질적인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너 지금 어디서 뭐해?”

“아, 나 잠깐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엄마 너 학교 끝나고 오면 나가야 하니까 바로 들어와서 동생들 밥 챙겨주라고 했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 정말.”



나는 조용히 엄마의 티셔츠를 내려놓았다. 이 방에는 한여름에 선풍기 바람을 타고 퍼지던 달큼한 복숭아 향도, 다정했던 엄마도 없었다. 아빠와 따로 살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부쩍 힘들어하는 날이 잦아졌고, 나 역시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지 못했다. 나를 꿰뚫는 엄마의 시선은 언제나 얼음송곳처럼 시렸고 날카로웠다. 송곳에는 원망이 짙게 녹아 있었다. 가끔씩 잘게 부서진 송곳들이 나에게 날아들어 콕콕 박히기도 했다.


순간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멈춰 있던 집안이 다시 심장이 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왠지 엄마가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빠져나왔다. 얼핏 본 엄마의 두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있었다. 혹시나 눈이 마주칠 세라 재빨리 눈길을 거두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내려놓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대로 엎드렸다.

눈 주위가 뜨겁게 달궈지더니 이내 물기가 맺혔다. 어디선가 달큼한 복숭아 향이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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