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작가님 소설 기초 글쓰기 5주차 과제_징면을 감정으로 표현하기
짙은 남색 카디건을 걸쳤다가 도로 벗어던지고 말았다. 흐트러진 숨을 애써 모아 내쉬자 뜨거운 공기가 새어나왔다. 바닥에는 슬랙스가 짓밟히듯 구겨져 있었고, 블라우스는 의자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거울 앞에 섰다. 늘어진 블라우스처럼 이마 위에 땀으로 눌어붙은 앞머리 몇 가닥이 꼴사납게 번들거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다음 휴대폰 액정을 톡 건드리자 금세 화면이 밝아졌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다. 겨우 한 시간 반이라니! 옷을 입고, 화장을 고치고, 약속 장소까지 이동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옷방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주저없이 의자에 걸려있던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로 손을 뻗었다.
결국 트위드재킷을 아무렇게나 걸친 채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 곧 지하철역 출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아득하게만 보였다.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가, 개찰구를 통과하고 승강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요동치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승강장 안내판에 눈을 떼지 못하던 중,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만 귀를 열었다. “야, 중요한 건 자신감이야, 자신감. 무슨 옷 입었는데? 너 설마 그 옷 그대로 입고 나간 건 아니지? 아니, 너무 공들인 티가 나도 부담스럽다니까?” 마치 나를 겨냥한 듯한 여자의 말에 일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승강장 안전문 유리에는 검은색 트위드재킷과 치마에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옆 사람에게서 슬그머니 몇 발짝 물러났다. 여전히 잠잠한 전광판을 한 번, 승강장 안전 문에 붙은 지하철 노선도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부담스럽다니까?’라는 여자의 말이 여전히 귓가를 울렸다. 다시 한번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주머니속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풀었다. 메시지 아이콘 오른쪽 위에 숫자 1이 빨갛게 떠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아이콘을 눌러 도착 시간을 확인하니 두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H였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히고, 겨우 진정됐던 마음이 이내 소란해졌다. 한창 옷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미처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 한 것이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참 안 가네요.’ H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해 미안함과 동시에 두근거렸다.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였다. ‘미안해요, 메시지를 이제 봤어요.' 지금 가는 중이라고 덧붙이려는 순간, 지하철이 도착함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굉음이 들렸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승강장을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글자를 모두 지우고 다시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저도요. 이따 만나요!’
분명히 좀 전까지만 해도 그는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정전이라도 된 듯 그의 의식이 아주 잠시 끊겼다가 돌아왔다. 간신히 눈꺼풀을 열자 모래알이 끼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서걱거렸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새하얀 화면 위의 커서가 연신 깜빡였다. 그 모습은 마치 그가 글자를 입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어내렸다. 머릿속에 물먹은 솜뭉치가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 정희는 지금 눈앞에 놓인 피자를 한 입 먹어보기 전에 아주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피자가 먹음직스럽게 나올까 고민하며 휴대폰을 피자 가까이에 가져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구도를 다시 잡아보기도 했다. 갓 구운 도우에서 피어오르는 치즈와 토마토소스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휴대폰을 식기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접시에 피자 한 조각을 신중하게 덜어냈다. 세계 피자 대회에서 우승한 피자의 맛은 과연 어떨까, 하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그녀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쫄깃하면서 담백한 도우와 고소한 치즈, 그 틈으로 스며드는 진한 토마토소스가 너무나도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다. 이 순간만을 위해 그동안 휴가를 쓰지 않고 참아온 자신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십 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곳이었다. 사고라도 난 것인지 도로는 그야말로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경수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앞차의 빨간 후미등만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운전대 윗부분에 손을 모은 뒤 그 위로 턱을 얹었다. 신호가 세 번 바뀔 동안 액셀 한 번 밟아보지 못한 그였다. 평소 출근길에 즐겨듣던 라디오도 오늘은 한낱 소음에 불과했다. 차 안에 있는 경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낫겠다.” 경수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오늘은 사무실에 들어갈 때 최대한 발소리를 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뭐지?‘ 스크린을 본 순간 처음으로 현숙의 뇌리를 스친 말이었다. 며칠 밤을 새가며 공들인 발표 자료가 떠있어야 했는데, 딱딱한 발표 자료 대신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한 크레파스 그림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현숙은 레이저 포인터를 쥐고 있던 손이며 두 다리마저 힘이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현숙은 그 웃음소리가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제 제출이 많이 늦었습니다. 늦은 만큼 열심히 따라가보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소설방 동기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지난주 컨디션 난조로 브런치 활동을 잘 못했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가님들의 글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