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애주가

by 유연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더러 있다. 책 읽고 운동하는 거 좋아해요.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해보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다. 재빨리 그리고,를 덧붙인다. 이 두 가지만으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들여다 본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오직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기꺼이 하는 것. 뭐가 있더라? 때마침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방에게 마치 비밀이라도 고백하듯 수줍게 말한다. 아까보다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혼술이요.” 라고.


첫 혼술은 십오 년 전, 오래된 학원가에 위치한 허름한 바(BAR)에서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전화를 하며 심하게 다투었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렸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진정이 될 것 같아 두리번거리던 중, 바(BAR)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깊은 밤이었다. 겁이 많아 밤길을 혼자 다니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대체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아 술집 문을 열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바에 들어선 순간 일제히 시선이 몰렸다. 그 기세에 주눅이 들어 그냥 집에 갈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그날은 다른 이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오로지 무너진 나를 돌보고 싶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잡고 앉아 칵테일을 주문했다.


미도리 사워 주세요. 애꿎은 휴대폰 덮개만 덮었다 열었다 하며 화풀이하는 사이 형광 초록빛 칵테일이 담긴 잔이 미끄러지듯 내 앞에 나타났다. 잔을 감싸 쥐고 한 모금 들이키려는 순간, 바텐더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표정이 안 좋은데 괜찮으세요?

조금 당황했지만 대답을 잠시 미룬 채 칵테일을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더니 이내 탄산을 톡톡 쏘아대며 사라졌다. 청량함이 전하는 묘한 해방감은 위태로운 감정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괜찮다고 애써 눌러왔던 것들 중에는 사실 괜찮지 않은 게 더 많았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처음 보는 이에게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냈다. 마치 오랜 친구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선 곳이 풍기는 생경한 분위기 탓이었을까, 아니면 타인이라는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묘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단어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하며 말을 하는 편인데 그날만큼은 두서없는 말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말을 하는 중간에 웃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혼자 분개하기도 했다. 스물 넷 인생 중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했던 순간이었다.





서른여덟. 치열하게 싸울 남자친구는 없지만, 그 대신 치열하게 사랑할 아이가 생겼다. 그저 사랑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사랑하는 만큼 싸워야 할 일도 늘어갔다. 남편과의 소통의 부재로 생긴 깊은 틈,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그리고 육아에 전념할수록 점점 희미해지는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 그야말로 간신히 버티기만 하는 나날들이었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나’는 주변의 소음에 휩쓸려 사라지고야 마는 육아의 세계. 그 소란스러운 곳에서 잠시 탈출해 나를 되찾는 유일한 구원은 바로 혼자서 마시는 술이다.

여전히 혼술을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나는 나의 은밀한 취미를 열렬히 사랑한다. 내가 누리는 이 해방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열 명 중 여섯은 눈이 휘둥그레져 되묻곤 한다.


“혼밥은 그렇다 쳐도, 혼술은 좀 어색하지 않아요?

대화할 사람이 없잖아요.”


나를 바라보는 이의 눈동자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적당히 서려 있다. 그러면 나는 상대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꼭 대화할 사람이 있어야 하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에게 나는 조금 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잇는다.


“나랑 대화하면 되잖아요.”



해방의 날. 즉 나의 혼술의 날을 결정하는 기준은 한 주간 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밀도에 따라 다르다.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두터울수록,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해 삼켜버린 욕설이 많을수록 ‘나’와 대화할 시간은 속절없이 앞당겨진다. 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고요함을 향한 갈증이 임계점에 다다를 때, 나는 ‘나’를 만나러 집을 나선다.


저녁 여덟 시. 옆 동네의 작은 단골 술집. 익숙한 공기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매달 새롭게 올라오는 ‘이달의 메뉴’를 습관적으로 훑어보지만, 결국 내 선택은 언제나 같다. 혼술을 할 때마다 나의 밤을 지켜주었던 육사시미 한 접시. 그리고 투명한 소주 한 병. 이로써 ‘나’와의 대화를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경건한 마음으로 첫 잔을 따른다. 이것은 나만의 고귀한 의식이다. 첫 잔을 따를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주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선명하게 꽂히는 소리. ‘똘똘똘’과 ‘꼴꼴꼴’ 그 사이쯤의 주파수를 찾아가는 청량한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금세 평온함을 넘어 행복해진다.


설레는 기분으로 첫 잔을 비우고, 육사시미 한 점을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다. 사실 몇 주 전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육사시미를 못 먹는다고 하여 못내 아쉬움을 삼켰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안주를 고르는 자유. 혼술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 하나뿐이겠냐만. 누군가 내게 혼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밤새도록 막힘없이 대답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혼술을 고집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너 사실 그때 안 괜찮았잖아. 그런데 왜 그냥 넘어간 거야?”


낮에는 미처 듣지 못했던 ‘진짜 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답하기 위해 나는 두 번째 잔을 비운다.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짙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잦은 다툼 탓에 냉랭한 기류 속에 눈치만 보며 자란 아이는 침묵과 갈등을 유독 견디지 못했다. 그 아이는 자라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애써 웃어 넘기는 어른이 되었다. 나의 기분이나 기호보다 상대에게 먼저 맞추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한 생존법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혼술은, 타인의 주파수에 맞추느라 방전된 나 자신을 위한 최후의 피난처였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검열할 필요 없이 오로지 나를 돌보는 시간.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내가 내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그래. 사실 난 그때 괜찮지 않았어. 나를 우습게 여기는 상대방의 태도가 싫고, 나의 경계를 멋대로 넘나드는 그 무례함도 진심으로 불쾌했어.”


“맞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무례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것이 상처인 줄 모르는 그들이 무지한 것 뿐이야.“


어쩌면 평생을 타인의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던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내 감정을 더는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같은 것 말이다.

얼마 안 있어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큰해진다. 이윽고 참아왔던 눈물이 한두 방울씩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나를 상처 입힌 타인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외면해 왔던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뒤 마시는 마지막 한 잔은 꽤 달큰하다. 이제야 타인에게 맞추었던 주파수를 거두어 나에게로 돌린다. 아침이 밝아오면 어김없이 전쟁터로 나가겠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 안에는 언제든 내 편이 되어줄 '또다른 나'가 술잔을 채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