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이노베이션 글을 마치며
FUTURE9은 2024년 8기를 끝으로 사라졌다.
이유는 정부의 공공 프로그램 확대 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NIH 신드롬이었다.
NIH. Not Invented Here.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오픈이노베이션을 일찍 시작한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내부 레거시 업무 조직, 자원을 가진 조직(재무, 인사 등)에게 공격받는다.
"이거 우리 꺼 아니잖아."
"결국 남 잘되는 거 아니야?"
"스타트업만 성장하고, 우리는 뭐 얻는 게 있어?"
투자 규모와 회수 속도도 문제였다. 전문 VC처럼 거액을, 공격적으로 할 수 없다.
그러니 피투자 기업이 성장해서 이익이 나도 평가절하되기 일쑤다.
"그 정도 수익으로 뭘 했다고..."
"VC들은 수백억 투자하는데, 우리는 고작 몇억?"
콜드콜링 노하우, 발굴 인사이트, 현업 설득 스킬, 워크숍 퍼실리테이션.
이 모든 것은 7년간의 경험이 만든 것이다. 시스템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7년을 달려오면서, 나는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2023년 12월, 휴직에 들어갔다. 2024년 12월, 퇴직했다.
나의 휴직 후, 8기는 약화된 상태로 진행되었고 프로그램은 결국 합병되었다.
휴직에 들어간 2024년 초,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론과 프로세스가 중심이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구조, 프로그램 설계 방법론, 단계별 운영 매뉴얼.
7년간 쌓아온 걸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업계 후임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같은 것.
그런데 밖에 나오니 풍경이 달랐다.
대기업 안에서 볼 때와, 밖에서 볼 때 오픈이노베이션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안에서는 "우리가 스타트업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보니, 스타트업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데모데이 끝나면 연락이 끊겨요."
"담당자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해요."
"6개월 매달렸는데, 결국 PoC 하나로 끝났어요."
"레퍼런스 준다고 해놓고, 정작 보도자료 한 줄이었어요."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그 무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10개 스타트업 중 하나가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6개월이 통째로 날아간 거다.
인력 2~3명이 반년간 매달린 시간.
그 사이 못 한 영업, 못 만든 기능, 못 받은 투자.
기회비용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생존의 문제다.
직접 스타트업들과 협업을 수행하면서, 대기업 오픈이노베이션의 허상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데모데이, 멋진 보도자료, 투자 규모 자랑.
그 뒤에는 현업 한 번 못 만나고 끝나는 스타트업이 수두룩했다.
프로그램은 매년 돌아가지만, 실질적 협업 성과를 낸 케이스는 손에 꼽았다.
그래서 글이 달라졌다.
이론과 프로세스를 줄였다. 대신 실제 사례를 늘렸다.
성공한 사례뿐 아니라, 어디서 막혔는지, 왜 무너졌는지, 어떤 신호를 놓쳤는지.
스타트업이 진짜 알아야 할 것들.
대기업 담당자가 차마 말하지 않는 것들.
사운들리처럼 기술은 좋았지만 플랫폼 정책 한 번에 무너진 사례.
트립비토즈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이면의 치열한 현업 설득 과정.
웨딩북처럼 3년간 매출 0원을 견딘 팀이 대기업과 만났을 때 실제로 어떤 벽에 부딪혔는지.
이 책의 부제가 "이론은 그만, 현실을 말하자"인 이유다.
처음부터 그렇게 쓰려고 한 게 아니다.
밖에 나와서 현실을 직접 겪고 나니,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2024년 12월 31일
23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 사무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6기를 만들면서 배운 게 있었다.
플랫폼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는 것.
좋은 연결은 강제하는 게 아니라 설계하는 거라는 것.
그리고 배타성을 버릴수록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생긴다는 것.
KB 안에서 Beyond KB를 외쳤다면, 이제는 KB 밖에서 진짜 Beyond KB를 실행할 차례였다.
2025년, 콜라이더
2025년 7월 1일, 개인사업자 등록.
9월 말, 법인 설립.
11월, 투자 유치.
콜라이더(www.collider.kr)를 만들었다.
오픈이노베이션 매칭 플랫폼(아직은 베타버전 수준의 플랫폼이다)
콜라이더는 물리학 용어로 서로 다른 입자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물질을 창조하는 입자가속기라는 의미다.
오픈이노베이션이 딱 그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6기에서 했던 일을 이제는 조직 밖에서 한다.
KB라는 간판 없이. 대기업이라는 권위 없이.
다만 방식은 같다.
스타트업과 스타트업을 연결한다.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을 연결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연결한다.
그리고 광을 팔지 않는다.
조직 밖에서의 실험
한 스타트업에 파트타임으로 C레벨로 합류했다.
자문만 하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과 함께 조직을 성장시켰다.
매출 50% 이상 성장.
투자자로서 2개 스타트업에 투자도 진행했다.
동시에 내 법인도 투자를 유치했다.
말뿐이 아닌 벤처스튜디오 모델.
단순히 투자하거나 조언만 하는 게 아니라, 스타트업 안팎에서 자문과 실행을 함께하며 직접 성장을 만들어가는 것.
6기에서 배운 그 방식.
하나 더 배운 게 있다. 스타트업끼리의 협업이 훨씬 빠르다는 것.
대기업과의 협업은 6개월에서 몇년까지 걸린다. 스타트업끼리는 빠르면 3개월이면 된다.
의사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직접 실행하기 때문이다.
통신시장, 외국인 시장, 시니어 시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스타트업을 연결하고 있다.
각자의 강점을 결합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기업 없이도 된다. 아니, 어떤 경우엔 대기업 없는 게 더 빠르다.
이런 현장을 매일 겪으면서, 글은 계속 바뀌었다.
스타트업 대표들이 실제로 부딪히는 벽,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허들, 대기업 담당자도 모르는 구조적 문제. 그게 이 책에 담아야 할 진짜 내용이었다.
글 쓸 시간은 점점 줄었다. 하지만 쓸 내용은 점점 뾰족해져갔다.
Beyond Organization의 의미
2025년 SNS에 올렸던 문장이 있다.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과정에는 책임질 수 있고, 솔루션을 만들 수는 있다."
조직을 떠나며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기도 하다.
FUTURE9이 사라진 건 슬펐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6기에서 함께했던 5개 기업. 현대건설, 현대이지웰, 현대드림투어, DB손해보험, KB캐피탈.
그들은 이제 각자의 오픈이노베이션을 하고 있다.
2022년엔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2026년 지금은 100개가 넘는다.
플랫폼은 만드는 사람이 떠나도 계속 돌아간다. 그게 진짜 플랫폼이다.
Beyond KB, 진짜 의미
Beyond KB, REAL Open Innovation.
우리는 그 슬로건을 홍보 문구로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Beyond KB는 "KB를 넘어서"가 아니었다. "KB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Real Open Innovation은 "진짜 오픈이노베이션"이 아니었다.
"배타성을 버린 오픈이노베이션"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의미가 하나 더 추가됐다.
"조직을 떠나서도."
대기업이 독점하는 게 아니라 플랫폼이 되는 순간.
그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조직을 떠나서도 플랫폼이 될 수 있다.
6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언가를 바꿨다.
5개 파트너사가 이제는 오픈이노베이션 주도 기업이 됐다.
100개가 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콜라이더를 만들었다.
2026년, 그리고 그 이후
2025년은 실행에 집중한 한 해였다.
2026년은 더 균형 잡힌 모습으로 돌아간다.
내 플랫폼도 키우면서, 투자자로서의 역할도 더 충실히 하면서.
오픈이노베이션은 한 기업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여러 기업이 함께 만드는 생태계다.
강제하지 않아도, 광을 팔지 않아도, 플랫폼만 제대로 만들면 흐름은 생긴다.
6기는 그 사실을 증명했다. 말이 아니라 구조로. 의지가 아니라 관계로. 홍보가 아니라 확산으로.
그리고 이제, 콜라이더가 그 다음 장을 쓰고 있다.
이론이 아닌 실행.
장식이 아닌 실속.
구호가 아닌 성과.
6기에서 배운 그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매일 확인하고 있다.
조직의 이름이 아니라
대기업의 권위가 아니라 경험의 신뢰로.
Beyond KB를 넘어, Beyond Organization으로.
2026년 2월
박원규
㈜콜라이더 대표
前 KB국민카드 FUTURE9 Program 총괄 (2017-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