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KB, REAL Open Innovation
2022년 봄, 6기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5년 동안 FUTURE9을 운영하며 매년 700개 정도의 지원서를 받았다.
그 중 매년 10~15개를 뽑았다.
그럼 나머지 688개는?
섹터를 벗어나면 훌륭한 기업들이 많았다.
KB와는 맞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딱 필요한 기술.
우리 손으로 직접 협업할 순 없지만, 그냥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스타트업들.
그래서 결정했다.
Beyond KB.
우리 것만 챙기지 말고, 판을 키우자.
당시 업계 구조는 단순했다.
액셀러레이터가 대기업을 찾아가서 돈을 받고 프로그램을 운영해주는 방식.
어떤 액셀러레이터는 벤츠를 메인 후원사로 끌어와 약 5억원을 받았다.
그리고 LG전자 등 다른 기업들한테 5천만원에서 1억원씩 운영비를 더 받았다.
그렇게 스타트업을 모집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데모데이를 열어줬다.
검증된 모델이었다. 하지만 구조가 명확했다.
한 기업이 돈을 내고, 액셀러레이터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스타트업은 그 기업에게만 맞춰진다.
우리는 거꾸로 가고 싶었다.
KB캐피탈, 현대건설, 현대이지웰, 현대드림투어, DB손해보험. 하나하나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 스타트업하고 일하고 싶어하는데 어디서 좋은 스타트업을 어떻게 발굴하는지 모르겠지?
우리도 몰랐어. 그래서 우리가 도와줄게. 기획, 선발, 운영 단계에서 우리 거 보고 얼마든지 벤치마킹해봐."
운영비를 받지 않았다. 대신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건 당시로선 이상한 제안이었다. 왜 KB가 자기 노하우를 공짜로 나눠주지?
왜 자기가 발굴한 스타트업을 다른 대기업한테 소개해주지?
지원서 양식에 두 단계를 넣었다.
1단계: KB와 협업하고 싶은 분야를 작성하세요.
2단계: 추가로 협업하고 싶은 기업 2개를 선택하세요.
743개가 지원했다. KB가 협업할 수 있는 기업은 기껏해야 20개 안팎.
그런데 2단계 선택지를 모아보니:
현대건설을 선택한 스타트업이 200개 가까이 됐다
현대이지웰을 선택한 스타트업도 200개 가까이 됐다
DB손해보험, 현대드림투어, KB캐피탈도 마찬가지였다
각 기업한테 그 데이터를 공유했다.
"그대들에게 관심 있는 스타트업이 이만큼 있어.
그대들이 원한대로 핀테크, 프롭테크, 헬스케어, 여행, 금융 분야로 나눠봤어. 한번 봐봐."
데이터를 주고 나서 우리가 한 말은 이거였다.
"협업하고 싶으면 해.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억지로 연결하지 않았다. 성과 숫자를 만들려고 강제 매칭하지 않았다.
"이 스타트업 좋으니까 꼭 만나보세요"라고 영업하지 않았다.
우리는 광을 팔려 하지 않았다. 플랫폼을 만들려 했다.
플랫폼은 연결만 해준다.
선택은 양쪽이 한다. 좋으면 하고, 아니면 안 하면 된다.
기사 문장은 간단했다.
"KB뿐만 아니라 타 기업 자원을 활용한 스타트업의 성장 지원을 위해 KB캐피탈, 현대건설, 현대이지웰, 현대드림투어, DB손해보험 등이 파트너사로 참여한다."
한 줄이지만, 이게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구조 전부였다.
포스터에도 그 마음을 박았다. 중앙에 KB FUTURE9 로고. 그 주변을 다섯 개 파트너사 로고가 둘러싼 그림.
우리는 그 한 장으로 "플랫폼"을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대기업의 본능과 반대되는 행동이다.
대기업은 독점하려 한다. 좋은 스타트업을 발견하면 자기가 먼저 계약하려 한다.
노하우는 경쟁력이니까 공유하지 않는다. 다른 대기업과 테이블에 앉는 건 더더욱 꺼린다.
그런데 우리는:
5개 기업을 같은 테이블에 앉혔다
우리 노하우를 공개했다 (기획, 선발, 운영 전 과정)
743개 지원 데이터를 5개 기업에게 나눠줬다
각 기업당 200개 가까운 희망 스타트업 명단을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협업 안 해도 돼. 선택은 너희가 해."
배타성을 버렸다. 이기심을 버렸다. 심지어 성과 욕심도 버렸다.
왜? 우리 혼자서는 700개를 다 볼 수 없으니까.
우리 혼자서는 오픈이노베이션 생태계를 못 키우니까.
억지로 만든 협업은 어차피 오래 안 가니까.
2022년 12월, 데모데이를 열었다.
"총 12개 업체가 각 사의 비즈니스 모델과 KB와 추진하고 있는 협업 및 공동사업을 발표했다."
그날 무대에는 KB와 협업하는 기업만 있지 않았다. 파트너사와 연결된 기업들도 있었다.
더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파트너사들이 200개 명단을 받고, 직접 스타트업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영업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2026년 지금. 6기에 참여했던 5개 기업 중 상당수는 자연스럽게 오픈이노베이션을 하고 있다.
어떤 기업은 자기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협업을 추진한다.
2022년엔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2026년 지금은 100개가 넘는다.
오픈이노베이션은 한 기업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여러 기업이 함께 만드는 생태계다.
좋은 스타트업을 독점하려는 순간 생태계는 멈춘다. 노하우를 감추려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
반대로 판을 키우면, 판 위의 모든 플레이어가 성장한다.
743개 지원서를 혼자 보려면 불가능하다.
5개 기업이 나눠 보면 가능해진다.
각 기업당 200개씩, 자기 섹터에 맞는 스타트업을 직접 고를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노하우를 공개하라. 감추면 경쟁력이 아니라 고립이 된다.
둘째, 데이터를 나눠라. 700개를 혼자 보지 말고 함께 보라.
셋째, 선택권을 줘라. 강제 매칭은 오래 안 간다.
Beyond KB는 "KB를 넘어서"가 아니었다.
"KB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Real Open Innovation은 "진짜 오픈이노베이션"이 아니었다.
"배타성을 버린 오픈이노베이션"이라는 뜻이었다.
이 원칙은 KB가 아니어도 적용된다.
어떤 조직이든, 배타성을 버리는 순간 생태계가 시작된다.
하지만 6기 이후, FUTURE9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에필로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한다.
프로그램이 왜 사라졌는지, 그리고 조직을 떠난 뒤에도 이 방식이 유효한지.
플랫폼은 만드는 사람이 떠나도 계속 돌아간다.
그게 진짜 플랫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