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주공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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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아파트 아래층엔 소년(초딩)이 살고 또 그 아랫집엔 소녀(초딩)가 산다. 소녀는 냥맘이라서 아파트 길냥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먹이를 준다. 그래서 소녀가 모습을 나타내면 온 동네 고양이가 모두 몰려들어 냥냥거린다. 덕분에 나 역시도 출근길에 가끔씩 냥이들이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는 행복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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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 돌아다닌다. 특히 밤에 마주치는 일이 많은데,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끌고 어딘가로 나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나는 나쁜 어른이라서 자주 밖으로 담배를 피러 나가고는 하는데, 생각보다 꽤나 많이 마주쳤다. 며칠 전 밤에는 계단을 올라가다 막 문을 열고 나온 소년과 마주쳤고, 문을 연 소년은 나와 마주치자 “끼에에엑, 씨바!”라며 화들짝 놀랐다. 문을 열고 나섰는데, 시커먼 옷에 시커먼 마스크에 시커먼 후드까지 입고 있던 나를 보고 꽤나 놀란 모양이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휴, 죄송합니다. 너무 놀래서요.”라며 사과를 꾸벅하고는 호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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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은 나를 알지만(얼굴과 사는 곳) 마주치면 아는 척을 하지 않으며, 나 역시 이 아이들을 알지만(역시나 얼굴과 사는 곳만) 웬만해서는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요즘엔 불이 나지 않는 이상 이웃간 서로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더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역시 ‘아는 사람’에게서 높은 확률로 발생하니까. 혹시라도 ‘이웃 사람은 친하게 지내도 되는 사람’이라는 위험을 줄까 싶어서다. (“믿을 만하다는 형용사가 사람이라는 명사 앞에 올 수 있나?” feat.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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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사는 이 아파트에는 내가 소년(초딩)이던 시절의 추억도 있다. 그때는 열쇠를 챙기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면 앞집 아주머니네 집에 가서 엄마가 올때까지 기다리기도 했고, 집에 무언가가 고장이 나면 아랫집 아저씨가 올라와서 고쳐 주기도 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던 윗집 할머니와 마주치면 귤 하나라도 얻어먹곤 했다. 물론 나 역시도 어른들을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했고 그들은 ‘000호 아들래미’라고 나를 기억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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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추억거리가 아쉽다거나 요즘의 소년소녀(초딩)들의 예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건 어른들의 잘못이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이런 위험이 도사리는 사회가 되어버린, 이렇게 만들어버린 어른으로서 마음 한 켠이 불편할 뿐이다. 출산과 육아, 양육. 돈도 돈이지만 그 이전에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게 순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