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팔목이 제법 얇아졌고, 나는 그게 서러워서 한참이나 콕콕 찔러보다 막차를 놓쳤다. 해가 뜰때까지 홍대를 돌고 돌다 ‘이러다 내일 일어나면 다리에 알 배기겠는데?’라고 생각했고, 경험으로 터득한 생각은 높은 확률로 현실화되어 지금의 나를 쩔뚝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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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의 단어는 박제였다. 마지막 장면이 박제되어. 추억으로 박제되어. 머릿속에 박제되어.. 등등 박제는 은희경 선생님의 <새의 선물>에 나오는 한 장면을 이야기하다가 튀어나온 단어인데, 덕분에 어제의 기억은 박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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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내게, 왜 윤동주나 박준이나 김영하는 아저씨라 부르고 은희경이나 김애란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냐란 질문을 했고, 나는 그럴싸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어니언링을 케찹에 찍어 먹었다. 케찹인지 케첩인지 케챕인지 모르겠지만 맛을 보면 우리는 모두가 같은 걸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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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는 7시에 청량리에서 출발할 예정이고, 우리는 6시가 되기 전에 홍대에서 인사를 나눴다. 뒤돌아본다는 건 간지가 나지 않는 행위라는 걸 그날 <새의 선물>에 나온 허석이 떠나는 장면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었고 함께 공감한 내용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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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미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경을 보자 조금 슬퍼졌고, 내가 풍기는 술냄새가 다른 손님들에게 약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진 않을까 싶어서 호흡을 조금 줄였다. 사람들은 내리고 탔다. 타고 내렸다. 해가 뜬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인데 끊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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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에 출발한 강릉행 기차는 세 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집에 데려다놓았다. 허리가 아팠고, 골반이 아팠고, 엉덩이가 아팠다. 오는 내내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는데,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깼고, 아랫배가 아파서 깼고, 방구를 낀 것 같아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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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자다가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다시 눈을 붙였다. 이번에는 푸하핰, 씨발, 존나 라고 떠드는 중학생들의 소음에 잠이 깼고, 그 다음엔 거기 학생들 조용히 좀 합시다!라고 소리친 어떤 아저씨 때문에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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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니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고, 지금 상태라면 2박3일도 거뜬히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 책방 휴무 공지를 올렸고, 그 뒤로 쏟아지는 잠을 거스름없이 받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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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나를 전쟁터로 인도했다. 꿈은 선명했고, 나는 어느 전쟁터의 통신병이었다.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아무도 적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실체 없는 적과 싸우는 전쟁터였다. 나의 상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네이버 월요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에 나오는 ‘자본주의의 신, 캐피탈리즘’이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그가 내게 소리쳤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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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호통에 잠이 깨자, 옆집인지 윗집인지 공사를 하느라 쾅쾅거리는 소리, 따다다닥하고 드릴이 벽을 뚫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시간을 보니 잠든 지 네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인부들은 어째서 낮에도 사람이 자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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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더 이상 잘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자 결국 할 수 있는 게 없던 나는 책방에 왔다. 책방의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자 캐피탈리즘이 내게 소리친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고함이 생생하게 다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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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본격 임시휴무날 임시오픈한 모든 사건과 시간의 인과율이다. 믓시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