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들
애인의 애인들
애인의 부음을 받은 건 어젯밤의 일이다. 그녀의 가족이 애인의 핸드폰으로 저장된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기에 나는 내 애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멍하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 애인이 죽었다니. 아니, 그전에 애인을 내 애인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애인이 분명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건 두 달 전이었다. 그나마 3일에 한 번 통화를 하던 일도 요즘은 뜸해졌던 상태였고, 대부분의 연락은 SNS 메신저를 통한, 아침에 잘잤냐, 저녁엔 잘자라 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애인과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랑이 불과 같다면, 우리의 사랑은 다 꺼진 재가 되어 화로에도 담기지 못했을 관계.
어쨌든 내 애인의 부고이며 한때 뜨겁게 사랑을 다 했던 사람이니 서글픈 심정으로 그녀의 영정 앞에 서게 되었다. 내 애인이 이렇게 생겼던가? 해맑게 웃고 있는 애인의 사진은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타인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녀와 내가 장거리 연애를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향을 피우고 나서 육개장에 밥을 말아 한 숟가락을 떴다. 가라앉아 있던 애인과의 추억이 슬며시 떠오르려 할 때다.
“주희야! 으어헝헝헝!”
웬 시커먼 남자가 허연 티셔츠에 사각팬티 바람으로 뛰어들어왔다. 부음은 어젯밤에 발송됐는데 이 남자는 왜 지금 저런 몰골로 다급하게 온 걸까? 분향소로 이어지는 바닥에는 그 남자의 때 국물이 묻은 시커먼 발자국이 덕지덕지 찍혔다.
“주.. 주희야! 끄흐허억억! 주희야! 대체.. 대체 왜! 으아아앙!”
분향소로 들어선 남자는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애인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숨 넘어갈 듯 오열을 터뜨렸고 그 행태에 상주로 있던 애인의 가족들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뭐야 저 사람? 대체 내 애인과 무슨 관계길래 저러지?’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그가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상주에게 건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끄윽! 흑! 흡! 주희야! 우리가 얼마나.. 크흡! 얼마나 사랑했는데! 흑.. 안녕하세요. 결례가 많았습니다. 흐윽, 흑. 저는 주희와 만나던.. 크흑흑. 주희의 애인입니다. 흑흑.”
내 애인의 애인이라고?
*
우리는 서로 말없이 앞에 놓인 육개장만 괜히 뒤적거렸다. 오열하던 남자는 여전히 팬티 바람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팬티남의 말에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주희의 애인은 나라구요.’ 라는 말을 던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뒤편 테이블에서 방울토마토를 먹고 있던 다른 남자였다. 그의 앞에 놓인 육개장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진 걸 보니 나보다 먼저 와있던 게 분명했다. 팬티남과 방토남이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는 와중에, ‘저기요. 지금 무슨 얘기세요? 주희 애인은 바로 전데요.’라며 서빙을 하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내게 육개장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세 남자가 엉킨 가운데 결국엔 내가 나섰다. ‘다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같이 대화를 좀 하시죠. 아, 저는 주희의 애인입니다.’라고 내 소개를 했으니, 우리는 지금 애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녀의 애인들이었다.
*
“저는 주희와 만난 지 일 년 조금 안 됐고요. 처음 만난 곳은 홍대의 한 클럽이었어요. 우리 주희가 알다시피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잖아요. 처음 주희를 봤을 때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인 줄 알았어요. 아, 나를 위해 강림한 여신님이구나. 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죠. 운명이었어요, 운명.”
“클럽? 이봐요! 무슨 소립니까! 클럽이라뇨? 주희가 클럽을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서빙남의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팬티남은 기겁을 하며 그의 말을 잘라냈다.
“저기, 잠시만요. 일단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어봅시다.”
역정을 내는 팬티남을 나직하게 타이르는 방토남이었다. 팬티남이 ‘아니, 우리 주희가 클럽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이라며 투덜거리다 시무룩하게 입을 닫자 다시 서빙남이 말을 이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주희는 흥이 많은 아이다. 밝고 명랑하며 에너지가 넘쳤기에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음주와 가무를 즐겼고 그 때문에 연애를 하면서도 꽤나 많이 다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리에 나서면 유명 기획사 매니저의 명함을 받는다거나, 쇼핑몰 피팅 모델 제의를 받을 만큼 화려하며 아름다웠다.
처음 만난 곳은 홍대의 유명한 클럽이다. 그 어둡고 음침하며, 양기와 음기의 페로몬이 득실거리는 곳에서도 단연 빛이 났다. 홀로 조명을 받는 것처럼 시릴 정도로 반짝이며 매력을 발산했다. 그녀의 주위로 몰려드는 수컷들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 공작새 마냥 꼬리를 잔뜩 부풀리며 기웃거렸고, 암컷들은 시기와 질투조차 포기한 채 경애와 존경을 담은 시선으로 찬양했다. 벼슬을 바짝 세운 수컷들은 그녀를 얻기 위해 피를 튀기는 경쟁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결국 안전요원에 의해 쫓겨난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서빙남은 그녀를 영접할 수 있었다. 경쟁을 통해 주희를 얻었던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간택(揀擇). 결국 수컷들의 경쟁이 아닌 암컷의 선택으로 밤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므로. 그렇게 서빙남은 주희의 간택을 받아 원나잇의 짧고도 깊은 인연을 맺은 후 끈질긴 구애 끝에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년 시월에 만나 올해가 벌써 구월이니, 1년이 조금 못 되게 만남을 이어왔던 셈이다.
“주희의 간드러진 애교와 톡톡 튀는 청량함은 제 삶의 비타민이자 구원이었어요. 그런 그녀가 대체 왜.. 어째서.. 흐흑.”
서빙남은 말을 마친 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애인들은 그가 진정되길 얌전히 기다렸고 곧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주희는 한적한 동네에 작은 선술집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어요. 삶에 지치고 찌든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 외로운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한잔 따라주고 위로를 하나 건넬 수 있는 그런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은 술집이요. 그래서 내가 3년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는데.. 3년만 기다려주면 함께 식을 올리고 그런 작은 가게를 하나 내자고 분명히 약속했는데.. 해맑게 웃으며 꼭 그러자고 했었는데..”
서빙남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그 주희가, 주희가 맞아요?”
방토남이 의심 가득한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네? 주희가 주희가 맞느냐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물을 닦던 서빙남은 얼척이 없다는 표정으로 방토남을 쳐다봤다.
“아니, 혹시 같이 찍은 사진 있으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알던 주희는 그런 애가 아닌데.. 여기 계신 분들도 다들 주희 사진 있으면 한번씩 봅시다. 애인이라면 당연히 사진 한 장씩은 있을 테니까.”
방토남의 말은 일리가 있다. 분명 영정 속 사진은 내 애인의 모습이었으나 방금 서빙남이 말한 여자의 모습은 내가 알던 애인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라 방토남이나 팬티남도 같았을 거다. 서빙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애인이 맞는지를 의심하는 티가 났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제각기 핸드폰을 꺼내 주희의 사진을 찾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은 주희와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게 언제였더라. 올봄에 찍었던 사진이니까 벌써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네.’ 속으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진을 내밀었다. 하나둘 자신이 찾은 주희의 사진을 꺼내 들었고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동시에 놀란 탄성을 내뱉었다.
애인들이 꺼낸 사진 속 주희의 스타일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내 사진 속 주희는 짙은 갈색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파스텔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V를 하고 있었다. 서빙남의 주희는 초록색 단발 파마머리, 쫙 달라붙은 청바지에 어깨가 드러나는 헐렁한 박스티를 입고 클럽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팬티남의 주희는 질끈 묶은 검정 똥머리에 등산복을 입고 배낭을 멘 채 어느 산 정상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고, 방토남의 주희는 연한 갈색의 웨이브 진 단발머리,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 H 치마를 입고는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애인들이 꺼낸 사진 속 주희는 스타일이 달랐지만, 분명 주희가 확실했다. 내가 몰랐던 주희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낯선 이질감과 익숙한 편안함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내 마음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어? 제주도네? 여기 산방산 아니에요?”
서빙남이 내 사진을 보고는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네, 맞아요.”
“저도 주희랑 여기 갔었거든요. 혹시, 우도에도?”
“아뇨, 저는 마라도.”
서빙남과 나는 씁쓸해하면서도 안도를 느끼며 말을 줄였다. 애인들은 서로의 사진을 보며 이놈들이 주희와 어디에 갔었는지를 살펴봤다. 나와는 가지 않은 곳을 다른 놈이랑 갔었다는 약간의 배신감(?) 서운함(?)과, 다른 놈이랑은 가지 않았지만 나와는 함께 갔었다는 우월감(?) 각별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애인들 모두가 같은 장소에 갔던 적은 없던 걸로 확인이 됐다. 관광지로 유명한 몇몇 지역은 겹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도 둘 정도였지 4명이 모두 한 장소에 방문한 적은 없었다. 사진 돌려보기가 끝나자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이 조금 길어져서 자리가 불편해지려 할 때 방토남이 입을 열었다.
“흠흠. 주희가.. 주희가 맞네요. 음, 제가 왜 사진을 보자고 했냐면.. 뭐, 그래요. 솔직히 제가 알던 주희와 말씀하신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그랬어요. 제가 아는 주희는 말이죠.”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주희는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전시회나 미술관에 가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작품을 살펴보고 해석하고 이해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충 눈으로만 훑어보고선 ‘나 이런 문화 예술을 관람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야’라는 인증샷을 남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주희는 달랐다. 하나의 작품 앞에서 무언가를 찾기까지 묵히고 묵혔다. 하나의 작품과 생사를 건 전투를 치르듯이 살펴보고 해체하고 대입하고 유추하며 해석을 해냈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씹고 또 곱씹었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그게 좋았다. 팜플렛이나 작품 아래에 적힌 해설은 참조일 뿐, 하나의 작품은 해석에 따라 천개의 작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주희는 그런 작품 해석의 묘미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식을 탐구하고 예술을 온전히 받아 드리기 위해 골몰하는 모습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의 감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다. 어떠했냐고, 즐거웠느냐고. 물론 말만 건넨 건 아니다. 미리 준비해둔 향긋한 커피도 함께 건넸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됐다.
주희는 미술과 문학, 예술과 철학 전반에 걸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반짝이며 빛이 났다. 물론 음악에 대한 깊이도 뛰어났으니, 실로 예술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그녀의 노트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안에는 예술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악보, 시로 써진 가사가 빼곡히 들어찬 연습장은 주희의 재능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나중에 작은 갤러리를 갖는 게 꿈이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초청하거나, 또는 특히 좋아하지만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품들을 들여와서 전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방토남은 그 꿈을 이루어주겠노라 약속을 했다고 한다. 물론 몇 년 후에 말이다.
“우리는 1년 반을 만났어요. 요즘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운명의 붉은 실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구요. 주희는 문화생활과 사색을 즐겨했어요. 데이트는 매번 전시회나 예술 마켓, 미술관으로 다녔구요. 그런 그녀가 클럽이라니.. 이해할 수 없네요.”
방토남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자신의 미간을 꾹 누르며 고개를 설레 저었다.
“클럽? 전시? 다들 주희를 잘 모르시네요.”
연신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던 팬티남이 이제는 진정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주희는 당신들이 아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주희는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프론티어였다구요.”
“프론티어요?”
팬티남이 마지막으로 코를 한번 크게 풀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얘기는 아래와 같다.
주희를 처음 만난 곳은 설악산 대청봉이다. 산악회 회원 몇몇과 함께 내설악에서 캠핑을 하려 모였는데, 그곳에 여신이 있었다. 이번에 처음 참가를 한다는 새내기 주희였다. 자신의 몸집보다 배는 큰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주희의 등을 바라보며 듬직함과 당당함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녀가 디딘 발걸음엔 새싹이 돋았고 땀방울이 떨어진 자리엔 꽃이 피었다. 혼자만의 수양에 정진하듯 그녀는 산을 올랐다. 사내놈들이 짐을 들어주겠다며 껄떡거려도 정중히 거절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후로도 몇 번씩 산행이나 비박을 함께 하며 볼 꼴 못 볼 꼴을 나누다 보니 끈끈한 동료애와 전우애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용기를 내어 따로 연락을 취해 둘이서만 떠난 등반에서 드디어 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주희만큼 당당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스스로 모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가 있으면 끈질기게 설득을 했고, 설득에 실패하면 합의점을 찾아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앞서 걸었고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그녀는 한여름 밤하늘의 별보다도 빛났다. 쏟아지는 폭포수보다도 힘이 넘쳤고 천 년이 넘은 고목보다도 신비로웠다. 그리고 또 자연을 사랑했다. 나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전하고 동물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식량을 나눴다. 아무리 예쁜 꽃이 있어도 허투루 꺾는 일이 없었고 작은 개미 한 마리도 밟지 않으려 신경을 썼다. 그 모든 모습들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주희의 꿈은 네팔에 있는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거라 했다. 세계의 지붕에 올라서서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거대한 자연의 기운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쏟아지는 별천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배낭에는 항상 헤진 네팔 여행 가이드북이 있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그곳을 갈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국의 설산을 동경하며 조잘조잘 떠드는 그 모습에 ‘내가 너를 꼭 그곳으로 데려가 주마!’라며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물론 몇 년 뒤에 시간과 돈과 여유가 생기는 그때 말이다.
“흐흑. 이럴 줄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크읍, 흑.. 주희야, 주희야!”
말을 마친 팬티남이 다시금 오열을 시작했다.
“등산? 캠핑? 에이, 설마 우리 주희가 그런..?”
방토남이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그래서 그쪽 분은 주희랑 얼마나 만나셨는데요?”
서빙남이 울고 있는 팬티남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저는.. 흑흑.. 크흡.. 273일이요. 이제 곧 300일이라 기념일 날 무슨 선물을 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크흑.. 주희야!”
서빙남은 273일이면 언제부터 얼마나 만났는지 손가락을 세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고, 방토남은 울고 있는 팬티남의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곤 곧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 분은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남의 얘기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내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뭐야? 우리 이야기는 다 들어 놓고 본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죠?”
방토남이 살짝 찌릿한 눈빛을 쏘며 말을 던졌고,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서빙남이나 눈물을 훔치던 팬티남도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결국 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을 시작했다.
“저는.. 음, 우선 주희를 처음 만난 건 대학생 때였구요. 기간으로 보자면.. 음.. 11년은 된 것 같아요. 처음엔 주희를 교내 산악 동호회에서.. 만났던가? 아, 아니. 전시회였던가? 아닌데.. 클럽이었나? 기억이 잘 나질 않아서. 아, 맞아. 아까 설악산 얘기하니까 기억이 났어요. 저도 주희랑 같이 설악산에 간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리고 클럽에서 생일 파티도 했었는데.. 그게 몇 살 때였지? 음.. 아무튼, 전시회나 미술관은 데이트할 때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몇 번 갔었고.. 예전에 한 번 주희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때는.. 그때는..”
‘세상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다 하고 죽는 게 내 꿈이야!’
그래. 여기까지 말을 하자 알아차렸다. 맞다. 이들이 말하는 주희는 내 애인인 주희가 맞다. 그녀는 소주를 시원하게 원샷 할 줄 알았고, 길거리 휴대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댄스곡에 맞춰 막춤을 추기도 할 정도로 흥이 많고 밝았다. 가끔 특별한 날 클럽이나 인디밴드의 공연장에 갔을 때는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방방 뛰며 즐길 줄 알았다. 클래식과 팝, 가요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음악을 좋아했다. 기타와 피아노, 우쿨렐레를 다룰 줄 알았고 취미로 자작곡도 몇 곡 만들기도 했다.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미술과 문학을 좋아했고, 조용한 곳에서 감상하거나 사색하는 걸 즐겼다. 그래, 우리 집 거실에 누워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다가 잠이 들기도 했었지. 꽤 자주. 그리고 또 여행과 등산을 좋아했다. 낯선 동네에서 자의적으로 길을 잃는 것이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 했던 너다. 우리는 태국이나 일본, 제주로 여행을 갔었고, 설악산 태백산 한라산을 등반했었다. 온몸의 힘을 모두 쏟아내고 올라선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좋다던 너다. 그래, 모두 너였다.
분위기 좋은 작은 술집을 차리자 약속했었다. 손님이 없으면 매일 우리 둘이서 한 잔씩 하는 거지 뭐, 라며 웃었다. 작은 갤러리를 갖자고 약속했었다. 공간이 크지 않아도 어디 경치 좋은 시골에 싼 농가를 구해서 우리가 직접 수리해 갤러리로 만들자고 했었다. 네팔에 가자는 약속도 했었다. 포카라에서 하염없이 호수를 구경하다 지겨워지면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오르자고 그렇게 약속했었다. 물론 약속의 끝에는 언제나 ‘나중에’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이다. 나는 모든 주희를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주희를 사랑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그런데 저는.. 언제부턴가 주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었으면, 옆에 가만히만 있었으면.. 내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며, 귀찮게 하지 말고 옆에 가만히 있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해서.. 나는 왜, 주희에게. 내가 왜.. 주희에게 왜..”
주희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터져 나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주희는 이제 없다.
<끝>
ⓒ인디문학1호점 2016-2019 @1st.indimunh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