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이별

by 유온

이별이 시작되었다


어제 난 끔찍하고도 처절한 이별을 맞이했다. 걱정과는 달리 슬픔도, 아픔도, 후유증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공포... 이별하는 그 모든 순간에 나를 엄습한, 그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두려움은 피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가 떠나가는 길 내내 나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비록 네가 아픔을 느끼진 못할지언정 끔찍한 기억만큼은 남기고 떠나겠노라고.


우린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불편해하지 않았기에 오랜 공존이 가능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기에 우리 사이의 경계선은 거의 한결같이 평화로웠다. 서로의 존재를 딱히 의식하는 일은 없었다. 특별한 교류도 없었다. 좋은 추억이랄 것도, 나쁜 추억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각자 존재할 뿐이었고,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었다.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영원히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원인이 보이지 않는 사건이 기습하는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러했다. 분명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늘 똑같은 일상이었다. 그와 나의 관계 또한 이전에 늘 그러해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를 게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긴 명절 연휴의 초입에서 묘하게 날 선 느낌을 받았다. 그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평화의 상징이던 우리의 경계를 기어이 넘어서고야 말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자극했다. 자신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인지시켰다. 그는 특히 내가 입안 가득 달콤한 것들을 잔뜩 욱여넣은 채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평온함에 막 빠져들려는 순간에 내 신경을 긁어댔다. 그리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굉장히 사소한 수준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굉장히 거슬렸다. 마치 잔가시 하나가 박혀서는 빠질 생각을 않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내 내면에 자그마한 의심이 자라났다. 그러고는 걷잡을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이 녀석이 끊임없이 주는 이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수준의 자극이 결국엔 내 살갗을 짓이겨 놓겠구나.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내 입안 전체를, 어쩌면 나를 아주 통째로 집어삼켜 버리고야 말겠구나.' 자그마한 고통 하나에 의심이 널리 번져나간다. 나의 정신은 내가 그로 인해 파멸하는 순간까지 보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가 노린 건 내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행복, 나의 평온함을 앗아가 버렸다. 그렇다. 그는 나의 정신을 손에 거머쥘 생각이었다. 사랑니! 그것이 나를 지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제 발로 공포를 향해 걸어가다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그가 내 정신을 훔쳐 달아나기 전에 내가 그의 안식처를 빼앗기로 했다. 마음을 먹기는 쉬웠다. 그와 이별하기 위해, 그를 뽑아내기 위해 내가 할 일이라곤 치과 예약이 전부였다. 치과에 들어서자마자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바로 결별이 가능했다. 드디어 사랑니 하나가 불러올 수 있는 가장 극악의 파멸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온 입안이 이 녀석이 불러온 염증으로 뒤덮인 채 멀쩡히 제구실 하던 다른 아이들마저 속절없이 떠나보내고야 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염증이 온몸에 퍼져나가 끝내 나마저도 집어삼켜지고야 마는, 모든 게 다 무너지고 나서야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바로 이별 가능'이란 말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치과 베드에 앉기 전까지는.


마취하겠다는 말이 들려온다. 자잘하게 따끔거리는 자극이 이어진다. 마취를 예고하는 말과 마취 바늘이 주는 자극, 말, 자극, 말, 자극이 반복된다. 마취하겠다는 그 친절하게 소곤거리는, 어딘가 나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 나의 의식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취 바늘이 입안을 찌르는 느낌에 나의 무의식이 깨어난다. '공포'라는 이름의 무의식이 의식을 짓누르고 수면 위로 부상한다. 공포가 서서히 내 숨통을 죄어온다. 모든 감각이 사랑니에 집중된다. 공포에 압도된다. 온몸이 사랑니에 가해지는 모든 행위에, 사랑니에서 비롯되는 모든 소음에 의식하고 반응한다. 공포에 마비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때, 공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치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가 평소 볼 수 있던 유형의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 앎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위이잉, 빠각... 입에서 흔히 날 법한 소리가 아니다. 강한 압력으로 뭉개는 듯한 느낌, 금속을 씹는 듯한 느낌 또한 입안에서 흔히 받을 법한 느낌은 아니다. 난 이 모든 낯섦을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말이 안 되니까.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 '방금 전기톱으로 내 사랑니를 갈았나 보구나, 방금 사랑니를, 온 힘을 다해 밀어붙였나 보구나, 방금 사랑니가 압력에 못 이겨 부러졌나 보구나, 방금 펜치로 사랑니를 뽑아내려 했나 보구나.'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런데 전기톱이라고? 만약 그 전기톱의 날이 길어서 내 입안을 전부 찢어버리면 어쩌지? 그럼, 입안 가득 피가 가득 차겠지? 피가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지? 혹시 그러다가 전기톱이 켜진 채로 피와 함께 삼켜지면 어쩌지?! 아니야, 괜찮을 거야. 지금 온 힘을 다해 사랑니를 밀어붙이시는데 그러다 힘 조절을 잘못해서 의사 선생님 손이 내 볼을 찢고 나오면 어쩌지? 볼에 난 구멍은 꿰매야겠지? 방금 이가 부러지는 소리였지?! 이가 깨지면 날카로울 텐데... 그걸 잘못해서 내가 삼키기라도 한다면? 아니야, 괜찮을 거야! 이제 이를 뽑아내시려나 보구나? 펜치 같은데, 잘못해서 그걸로 다른 치아를 치기라도 한다면...'


날 겁주는 사랑니 하나와 이별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공포를 마주한다. 사랑니가 이끄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과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작은 공포 하나가 거대한 공포를 낳는다. 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그러나 멈출 수가 없다. 이 공포의 향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미 공포에 발 담갔고, 이별이 끝나기 전까진 이 공포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숨이 멎어버릴 듯한 이별의 종말


의식을 잠식한 공포로는 오만가지의 잔혹한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의식이 제동을 걸어주지 않는 이상 공포가 창조해 내는 이 잔혹동화는 끊임없이 몸집을 키워나간다. 이해할 수 없는 소음, 이해할 수 없는 압력이 입안에 맴돈다. 의식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아득한 저편에 숨어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등진 채 저만이라도 살아보겠다는 듯 그렇게 공포 앞에 홀로 남겨진 나를 외면하고서.


그러다 갑자기 이별의 종말을 맞이했다. 소음이 멎었고 기괴한 느낌도 사라졌다. 다시 안전해졌단 것을 눈치챈 것인지 숨어있던 의식이 깨어났다. 의식은 상상의 고리를 끊어내고 비대해진 이야기를 와해시켰다. 드디어 난 긴장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그간 잃어버린 정신이 놓쳐버린 호흡의 박자를 되찾고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몸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 든다. 몸의 떨림도 멈췄다.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현실이 보였다. 공포로 인해 기진맥진한 나,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 뽑혀 나간 너, 그리고 끊어진 우리의 연결. 나를 겁먹게 한 사랑니는 나에 비해 아주 작았다. 이 조그마한 것이 품었을 야망을 다시 생각해 본다. 어둠을 드리운 채 입안 깊숙한 곳에 음습하게 자리 잡고 앉아 있을 때는 그렇게 거대하게만 느껴지더니, 그렇게 잔악무도해 보이더니. 밝은 조명 아래로 끌고 와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으로 작고 앙증맞을 수가 없다. 난 도대체 이 앙증맞은 아이를 두고 무엇에 그리고 압도되었던 것인가. 흐려진 눈으로 너의 야망을 상상하다 우리 둘 다 평온함으로부터 뿌리째 뽑혀 나가버렸구나. 내가 공포에 억눌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미쳐 버렸었구나.


그러나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주할 일 없을 우리였고, 이제는 떠나보내야만 할 그였다. 난 공포에 이끌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택하였다. 이렇게 잔인하고도 혹독한 이별의 시작을 내가 내 손으로 열었다.


어제 난 끔찍하고도 처절한 이별을 맞이했다. 걱정과는 달리 슬픔도, 아픔도, 후유증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공포. 이별하는 그 모든 순간에 나를 엄습한, 그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두려움은 피해낼 도리가 없었다. 공포는 그를 떠나보내는 길 내내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비록 네가 아픔을 느끼진 못할지언정 끔찍한 기억을 선사하겠노라고.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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