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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분노

이상일 감독의 분노(2016)


세 개의 사건과 한 편의 영화


이 하나의 영화 속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 얽힘으로 세 이야기는 하나의 영화가 된다.


세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모든 이야기, 그 중심에 부부 살인사건이라는 하나의 중심 사건이 있다. 이를 축으로 하여 모든 이야기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움직임이 영화를 보다 풍부하게, 다채롭게, 생동감 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더욱 '닮게' 한다. 이 세 이야기 사이에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여백은 그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으려는 우리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노력과 더불어 강한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또한 부부 살인사건이라는 소재가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심이 들게 함으로써 그 이음새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세 편의 이야기 속 인물은 서로 닮아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믿게 되는 사람, 내면은 그 누구보다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들 모두 진실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불신과 분노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인물 간의 갈등구조 또한 유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믿음으로 시작됐다가 불신으로 깨지고 상처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의 파생물로 분노를 남긴다.


연출의 측면에서는 각각의 이야기 속 장면을 연속으로 재생한다거나 누군가의 음성을 세 이야기 위에 동시적으로 위치하게 하여 서로를 연결 짓는다. 덕분에 서로 다른 시공간의 사건임에도 마치 동일한 사건을 각도만 달리해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모든 인물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사람의 뇌는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복잡하다면 굉장히 복잡하다.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임에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처럼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동일한 사건임에도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사건으로 느낄 수도 있다. 같은 소재, 같은 소리, 같은 공간 구도, 같은 색감 등의 연속적 재생은 다름을 같다 여기게 만든다.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시되는 시간에 따른 사건 전개나 인과관계에 벗어난 방식이기 때문에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기억의 방식과 닮았기에 더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관계에 얽힌 분노


많은 이가 분노하였다. 아이코, 요헤이(아이코의 부), 유우마는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고 사랑을 준 이, 그래서 자신을 믿게 된 이에게 큰 상처를 준다. 그들은 믿을 곳 하나 없다 여긴 세상에서 만난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이였기에 타시로도, 나오토도 무방비 상태로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그런 이들의 믿음을 처절히 짓밟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들은 분노한다. 정말 사랑한 이였기에 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떠올리며 조금 더 믿어주지 못한 자신을 향해 분노한다.


이즈미는 미군에 의해 성폭행당한다. 그러나 이 끔찍한 사건보다도 그녀를 더 분노케 하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알릴 수조차 없는 현실에 있다. 어차피 말해봤자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현실, 자신의 무기력함에 분노한다. 타츠야의 경우 조금 더 복합적인 분노를 보인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이즈미를 고통에 빠뜨린 데 대한 죄책감에서 시작된 자신을 향한 분노, 믿었던 타나카의 배신에 대한 분노.


타나카의 분노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는 아니다. 그의 분노에 대한 역치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낮은 편이다. 분노하는 타이밍, 포인트 또한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크게는 타인이 자신을 동정할 때, 타인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분노한다. 여기서 특히나 눈여겨볼 점은 표출된 분노의 형태이다. 강자에 의해 발생한 분노는 비아냥거리기만 할 뿐 참고 넘어간다. 이때 운 나쁜, 친절한 약자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 분풀이한다. 그의 이러한 분노는 많은 부분에서 타인에 의해 상대적으로 떨어진 자신의 가치, 즉 '열등감'에 의해 설명된다.



분노하는 이유


시선을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보자.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얼룩진 분노, 무력감에 대한 분노,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는 우리도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분노이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며 더 공감할 수 있었고 더 마음 아팠고 더 화가 났다. 누구보다 잘 아는 감정은 보여주는바 이상으로 나를 뒤흔든다.


제삼자는 약자와 강자 중 어떤 이에게 더 가까울까? 나의 경우 약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때가 더 많다. 이타적인 마음, 세상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그런 온화한 마음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약자의 편에 선다. 약자보다 강자를 비난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일단 상대적으로 죄책감이 들지 않는 데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약자의 편에서 이해하고 편들어주는 게 익숙한 나에게 이 영화는 그 이상의 분노를 안겨준다.


<분노>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분노는 충분히 또는 그 이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환기구가 없어 답답한 느낌, 그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 안에서 분노는 소모되지 않고 계속해서 축적된다. 이렇게 가중된 우리의 분노가 영화의 마지막 완성도를 채운다.



그래서?


의외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분노, 좌절감보다 안타까움과 씁쓸함, 측은함이 더 크게 남는다. 사람은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특히 감정에 취약하다. 누군가가 주는 상처에 약하고 나의 감정에 약하다. 감정은 집중해서 제어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자신을 삼켜버린다. 그래서 우린 나약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감정을 조금 덜 느끼는 방향으로, 딱딱하고 가벼운 인간관계를 만들게 된다. 덕분에 큰 기복 없이 그나마 평탄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영화는 그런 방어막을 허물어 버린다. 그래서 극 중 인물은 쉽게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이는 사랑하는 관계, 신뢰하는 관계라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와 같은 위치가 아니라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이후 뒤따라야 할 치유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물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고통을 준다. 상처받은 이는 그 아픔에 의해 더 방어적인 사람이 되거나 더 나약한 사람, 나를 지켰던 모든 것을 놔버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감정의 벽을 무너뜨리고 약하디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노출한다. 난 종종 '인간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 순간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낀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불쾌함보다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인다. 이는 감독이 흔드는 대로 따라 흔들린 나약한 자신을 마주했기 때문일 수도, 그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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