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슈타인 군나르 지그라쏜 감독의 언더 더 트리(2017)
이 영화가 불편한 진짜 이유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본다. 심지어 거기서 재미까지 느낀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평소의 도덕적 잣대를 내려놓고 영화가 제공하는 쾌감에 오롯이 젖어 든다. 즉, 몸에 밴 도덕성이라 할지라도 별다른 불편함 없이, 오히려 흥미롭게 부도덕한 행위를 즐길 수 있는 게 영화라는 매체이다. 그래서 궁금증이 인다. <언더 더 트리>가 불편한 진짜 이유에 대해.
잉가가 주는 불편함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을 꼽자면 단연코 잉가가 아닐까? 셰퍼드를 죽여 박제한 장면과 엔딩씬에서 살아 돌아온 고양이를 마주하는 장면은 우리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한다. 인간이라면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해도 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구분하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복수를 위해, 자신의 분노 표출을 위해 무고한 동물을 죽이는 그런 극악무도한 일은 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에서부터 열까지 부도덕한 사람으로 비친다. 그리고 우린 그런 그녀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다. 이제 우린 부도덕함이 우릴 불편하게 만든다고 단정 짓게 된다. 그런데 정말 여기서 멈춰도 될까?
잉가가 악역이 된 이유, 불편한 인물로 꼽히게 된 이유가 그녀의 부도덕함 때문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진 않다. 정확하게는 그 조건만으로는 꼴 보기 싫은 인간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잉가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면 그녀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감정적이고 근거 없이 타인을 비난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그 상실의 고통 속에 무너져 내린 그녀는 세상에 나보다 더한 상처와 고통을 짊어진 이는 없다는 듯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한다. 자신의 고통만이 중요시 돼야 하고 이해받아야 하며 존중받아야 한다. 그녀가 보여주는 이러한 이기심은 우릴 그녀로부터 더욱더 등지게 만든다. 정리하자면 그녀가 불편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고 의심하면 안 된다는 기준에 의해서라거나 아무 죄 없는 동물의 생명을 함부로 취하면 안 된다는 기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가, 그녀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는 데 더 가깝다. 이에 더해 우린 상황을 악화시키는 인물을 싫어한다. 나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답답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측면에서도 잉가는 최악의 인물로 비칠 수 있다.
가시방석의 탄생
전반적으로 경직되고 예민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인물의 심리에서도, 극의 분위기에서도 굉장히 딱딱하고 답답하며 언제 깨질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도 굉장히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위협은 상대를 방어적으로 만든다. 모든 것을 오픈하고 보기에는 내가 다치거나 충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요소의 극대화. 이 영화엔 우리가 싫어할 법한 것들이 아주 뚜렷하고 예민하게 다뤄지고 있다. 차마 우리의 시선은 이를 피해 가지 못하고 그 요소를 직시하게 된다. 불편한 것은 불편한 상황에서 마주하면 더욱더 싫어진다. 그렇게 영화를 통해 관객의 마음속에도 짜증과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나무라는 존재
처음엔 이웃 간의 겉보기 불화가 나무임을, 즉 진짜 불화의 원인이 아닌 허황한 이유를 들어 억지를 부리는 것을 나무를 통해 풍자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땐 나무라는 소재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영화에 대해 여기저기서 제공하는 정보로부터 깔고 간 첫인상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무를 벤다고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를 베어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원인 파악을 제대로 해야만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그런데 다시 봤을 땐 의미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의미적인, 교훈적인 측면보다 사건의 발단, 사건의 공간으로써 그 의미가 짙어졌다. 큰 의미보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느낌이다. 사건을 발생시키기 위한 도구, 당신의 불편함을 극대화할 도구.
또 다른 역할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의 접합이 있다.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뉜다. 이웃 간의 불화를 다룬 이야기와 가정의 불화를 다룬 이야기. 물론 두 이야기는 주연인 아틀리를 통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인물 및 시공간적으로는 이어져 있음에도 개별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개별성을 의미적으로는 '불화'를 통해 연결 지었는데 사건적으로는 그 연결지점을 '나무'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나무는 이웃의 문제가 집중되는 주 무대이자 아내의 이혼 메일을 받은 아틀리, 이제야 편안해진 아틀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종결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들은 끝내 '불편함'으로 모든 것을 매듭짓는다.
불편함이 미치는 영향
<언더 더 트리>는 왜 불편하게 만들어졌는가? 이런 불편함을 통해 잉가와 같은 인물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그녀를 가엾게 여기라고 만든 것도 아닌 듯하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불편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마주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전자의 경우 별다른 거부감 없이 현상을 바라보게 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후자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외면하려는 심리를 자극한다. 또한 주목하게 만드는, 이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그런 묘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내가 발견한 이 영화의 시작, 그 모든 근원은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이다. 인간관계는 억지로 유지하려고 들수록, 부여잡으면 잡을수록 더욱더 틀어지게 마련이다. 좋게 보려 해도 싫은 점이 더 자주 눈에 밟힌다. 꼴 보기 싫어 눈을 돌려도 자꾸만 짜증 나는 점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대상이 더 싫어하게 된다.
불편함이 만드는 영향? 사실 이 영화는 그런 영향력을 누리고자 한 것 같진 않다. 그저 인간의 심리를, 인간이 싫어하는 것을 더욱 싫어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잘 관찰해뒀다가 이를 영화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