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1)
그날따라 날씨는 춥고 창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방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SRT 안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메일 도착을 알리는 알람이 들려왔다. 그룹 임원 인사 명령서였다. “대표이사 김 oo, 무 보직 상임고문에 명함.”
39년간 열정을 바쳐 일해온 회사에서 이제 멈추라고 한 것이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수서역을 향해 불같이 달렸다. 하지만 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결정했다. 주주총회를 마치면 ‘산티아고’로 가겠다고···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바보는 방황하고 현자는 여행한다.”는 토마스 풀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지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대신, 오히려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더불어 즐기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은퇴 명령을 받고 내가 내린 결정이 여행이었다.
사실 언제부턴가 은퇴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산티아고 순례를 가는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 했었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느 날부터 순례길이 내 버킷 리스트 제일 위 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 떠나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39년간 줄 곳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 도중에 국제단체에서 사무총장으로 초청도 있었으나 현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21년 무역의 날 훈장과 ‘23년에는 모 경제지 선정 ‘대한민국 100대 CEO’에 선정될 정도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나의 직장생활은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사업 동반자와 정관계 인사들, 사회 친구들, 회사 직원들 그리고 그룹 내 동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와 토론을 즐겼던 나로서는 꽤 괜찮은 삶을 누렸다.
언제나 필요하면 만날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나 '은퇴란 것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거나 멀어져야만 하고 때론 홀로 되어야 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대기업에서 오랜 임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치명적 약점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라는 점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꽤 많으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호텔과 비행기를 예약하거나 관공서에 가서 서류를 발급받는 일 등 얼핏 쉬워 보이는 일 자체를 직접 해 본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동안 감사하게 누려왔던 많은 권한과 풍성함에서 내려와 스스로 해결하고 어려움과 궁핍함에도 익숙해져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외로움과 홀로 됨, 내려놓음과 자립이 필요했고, 새로운 세상에 나가는 초년생 같은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비한 최적의 훈련 방편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것이다.
주주총회에서 예정대로 대표 이사직을 내려놓고 한 달도 안 되는 4월 17일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배낭과 소요 물품을 사고, 도보 훈련과 육체적 취약점에 대한 점검, 치료를 마치고 번개처럼 준비하여 전장에 나가 듯 비장한 각오로 출발하였다. 매번 출장을 위해 탑승했던 국적 비행기에 커다란 등산 배낭을 메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내 모습을 의아해하는 승무원들도 있었다. 한 승무원은 자기도 ‘산티아고 순례길’ 가는 것이 꿈이라며 나의 여행을 매우 부러워했고 수줍은 얼굴로 고추장 튜브 몇 개를 건네주기도 했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내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커 귀에 들릴 정도였다. 1988년 독일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길에 처음 들려본 파리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어 그 이후에도 많이 방문했던 도시였다. 더욱이 나는 독일과 영국에서 6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에 유럽 도시가 전혀 낯설지 않았음에도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모르는 이유로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처음 느껴 보는 묘한 감정이었다.
이렇게 떠난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 대장정은 파리에서의 휴식과 적응 시간을 거쳐 2024년 4월 19일 산티아고 여러 순례길 중 ‘프랑스 길’ 출발 도시인 ‘생장 피에드 포르‘로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