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순간, 나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끊임없이 나를 찾는 나에게

by 제이유

내 삶에서 멈춤이라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의지와 욕심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에 몰두했다. 휴학 없이 대학교 졸업 전에 대기업에 취업했고, 입사 1년 만에 본사로 발령나 혹시 로열 패밀리냐는 소문을 들으며 서울로 상경했다. 친구들은 늘 나에게 "너는 나중에 큰일을 할 거야"라고 장난 섞인 농담을 던졌고,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자연스럽게 좋은 남자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욕심껏 미루었던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무사히 논문까지 쓰고 졸업했다. 바로 그 때 삶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걸었다. 어라,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네가 뭔데 날 건드려?


날 건드린 건 내 안의 인정욕구였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그 여러가지 역할들에 충실하려고 나름 애썼지만, 사실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육의 일부분을 친정엄마와 남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전화 너머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등돌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직무 변경에 눈이 멀어 안 해도 될 프로젝트를 떠 안았는데, 성공시켜놓고 보니 원래 내 목표 업무범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만한 평가를 못 받았다. 그 프로젝트를 하느라 대학원 수업에는 밥먹듯이 지각하고 결석해서 성적표는 비가 내리고 씨가 뿌려졌다. 그래도 나 홀로 카페에 앉아 하루 9시간을 논문 쓰는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참 열심히 사는 친구다.'라는 교수님의 동정어린 마음으로 대학원 졸업장은 받았는데, 직무 변경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됐다. 육아에 지친 친정엄마와 사이가 틀어질 때쯤 결국 내 안에서도 나를 놓았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그때부터 나는 멈췄다.


학교는 이미 졸업했고, 회사는 그만뒀고, 친정엄마와 집을 분리해 이사 나왔다. 변화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곧 내가 살아온 35년의 동력을 멈춘 것과 같았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산과 강을 끼고 예쁜 시골 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전 직장 동료들은 나의 그런 선택에 '부럽다.'고 했다. '내가 꿈꾸던 삶이 그런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을 살면서 내 안의 불안과 초조함은 점점 더 커졌다. ‘지금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커리어는 이대로 끝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끔은 불안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내 삶에서 이렇게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축복이고 행복일 텐데, 나는 계속 과거를 헤매고 미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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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미움받을 용기』p.134


이런 내게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니 고마울 수 밖에.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가는 삶, 언제까지 남들 인정받으면 좋다고 헤헤거리며 살 것인가. 사실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서 타인의 기대와 비교의 압력 아래 인정받으려고 애쓰며 힘들어했던 것이다.


물론, 이걸 하나 깨달았다고 해서 당장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쩌면 다시 시작하는 것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만의 길을 찾으면 되는 일 아닐까? 세상은 넓고, 빠르게 변하고, 정답은 주관식이니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초조해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성장한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고 해서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면에서 더 깊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p.42


멈춰있는 지금도 나는 멈춰있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겉보기엔 작아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삶의 지혜를 배우고, 뜻밖의 내공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심이랄 것도 없지만, 이제 이 멈춤을 물 흐르듯이 흘려보내기로 했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 물이 가다가 돌에 부딪히면 돌아서 천천히 흐르듯, 나 역시 그렇게 흘러가 보면 된다.


좀 쉬었다 간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다. 지금 이 멈춤의 순간은 어쩌면 내 인생의 커다란 쉼표일 뿐이다. 쉼표 다음엔 어떤 문장이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저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생각한다. 나는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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