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사이에 새겨진 횡단보도가 말했다
몇 년째, 몇 달째, 몇 주째, 며칠 째 이어진 녹진한 대화 끝에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나와 그 사이에 짜여진 안전망은 그 어떠한 방해에도 거뜬히 방어하는 튼튼함을 자랑하는 쇠줄로 만들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도리어 집게손가락으로 툭 치면 힘없이 훅 하고 끊어지는 거미줄과 같았다. 첫 만남부터 서로를 마음에 담아두었기에 그날 이후로 흐물흐물하고도 얇디얇은 선이 우리 사이를 오고 갔다. 본격적으로 연인이 되고 혼인신청서를 내고 가족이 되어 서로의 옆자리를 지키면서 우리 사이에 빈틈을 파고든 실선은 두께 조절이 가능한 실이 되어 이 실이 저 실에 엮이고 저 실이 이 실에 엮여졌다. 서로에게 묶이는 동안 우리 사이의 여유는 사라지고 촘촘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눌러앉았다. 매미합창단의 뜨거운 열기로 데워진 한여름밤, 달이 발광한다. 오늘따라 달이 밝다. 달 한가운데 노란불이 깜빡인다. 모스 부호인가? 환한 달빛이 얼굴에 스며들어 두 뺨에 광채가 올라올 때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띠리리리릭! 목소리만으로만 만났던 그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미안한 마음을 살짝 내비치며 생긋 웃는다. 그를 안아줄 준비를 하고 두 팔을 번쩍 들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런데 웬걸,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의 입에서 신용카드 결제 시 드르륵 인쇄되는 종이영수증 같은 건조한 단어의 조합이 완성된다. 그에게서 출력된 영수증을 확인하자마자 우리의 세계는 와르르 무너진다.
“(괄호야) 나 이혼하고 싶어. 우리 이혼하자.”
결국 그는 나를 놓아버렸다. 서로를 위해 절벽 끝에서 용케 붙잡고 있던 빛바랜 낡은 밧줄을 저쪽에서 먼저 놓고야 말았다. 드디어 선택을 했구나.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다고? 그동안 내 몸을 갈아가며 쏟았던 노력은 아무 소용 없어지는 건가? 그의 말은 현관문과 부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나의 발등에 스르르 떨어져 발등 아래를 파고들어 못이 된다.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못은 신기하게도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벙쪄서 표정관리가 안 되는 경직된 얼굴로 부동의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마치 풀리지 않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언제쯤 이 주문을 풀 수 있을까?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다시 현실감각을 익힌다.
“저기요, (괄호씨).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건네는 첫마디가 이혼하고 싶다고? 나랑? 니가? 우리가? 왜?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말이야 방구야?”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일단 그에게 의자에 앉아서 저녁밥을 먹고 얘기하자고 달랜다. 그는 하루에 한 끼를 먹는 사람이라 배고플 테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민할 테니까. 며칠 전처럼 신경질 내며 나에게 화낼 테니까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흘깃 보며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 타래가 뿜어져 나올지 지켜본다. 눈치를 보는 나의 눈동자에 노란 불이 깜빡인다. 이미 노란 불엔 눈물이 고인 지 오래다.
가수:에픽하이
노래: 스포일러+헤픈엔딩
https://youtu.be/M8GUlNNXBVg?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