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Apr 16. 2022

학문의 쓸모

당신의 자녀가 역사를 전공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종종 듣던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한 시간을 꼬박 운전해야 하는 출근길에 듣기에 적합했다.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무어라도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만한다는 강박에 찾아낸 방송이었다. 어쩌고 세계사, 하는 방송이었는데, 우선 역사만을 주제로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러한 방송이 10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다는 점은 더욱 놀라웠다. 그래서 종종 듣게 되었다. 물론 한 시간 동안 역사 이야기만 하는 방송이 인기가 있을 리 없으므로 편성 시간은 매주 일요일의 이른 아침이었고, 당연히 그 아침에 깨어나 라디오를 챙겨 들을 만 한 열정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늘 '다시 듣기' 기능을 활용해서였다. 내용은 퍽 유익했다. 재미도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패널로 나와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쏟아내었고, 역사교육을 전공한 진행자는 풍부한 상식을 바탕으로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곤 했다. 비록 차량 내비게이션 안내음이나 속도를 줄이라는 경고음에 라디오의 대화 소리가 묻히기 일쑤였지만, 역사를 가르친다는 작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라디오를 통한 지식 습득은 그 시도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덜어 내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출근길에, 업무 시작도 하기 전에 굳이 진을 뺄 필요가 있겠냐는 안일한 타협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되면서, 나의 채널은 추억의 mp3파일 묶음으로 넘어가게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 다시 듣기 팟캐스트를 열어 보았다. 지난 9월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방송이 더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사실상 종영한 모양새였다. 역사를 주제로 한 방송이 그러면 그렇지. 출근길 차 안에는 이런저런 가요들이 다시 스피커 볼륨을 가득 채워 나갔다.



2



  한 달 반 동안 삼십여 명의 학생 개별 면담을 마쳤다. 처음 만나 하는 이야기는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진로 진학, 학업, 교우 관계, 학교 생활 적응도, 뭐 그런 것들. 너무도 당연하게 학생들 태반은 이공계열을 희망하였고, 나 역시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의여도 타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워낙 드물어서 그런가, 어쩌다 인문 계열을 희망하는 학생을 만나면 동족을 만난 느낌에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수학이, 과학이 싫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역사를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내 수업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거 해서 뭐 먹고살게. 이런 식의 반응이 먼저 나왔던 것 같다. 친구들의 질문을 받아주다 보니 설명하는 데 재능이 있다고 느껴 역사 교사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역사 교사라면, 그래, 생각할 법 하지. 그래도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여유 있게 생각하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말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걸 보니 나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너희 집에 돈 많아? 사학과를 선택하기 전에 들은 이야기인지, 역사 전공을 한다는 말에 대한 반응인지, 내가 들은 이야기인지 남이 들었다던 이야기인지 솔직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이라면 으레 듣는 통과 의례 같은 거였다. 내게 석박사 통합 과정을 권유하던 학과장님, 제일 처음에 제게도 저렇게 한 번 물어봐 주시지 그러셨어요.


4


  처음 교사를 시작했을 때도. 사범대학교 교육과가 아닌 순수 학문을 전공했다는 말에 돌아온 반응은 그런 것이었다.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어." 대단하다는 말을 저렇게 대단치 않게도 할 수가 있구나, 신기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순수했던 스무 살 중반의 나는, 자랑스럽게도 대답했었다. "대학교는 직업학교가 아니라, 큰 학문을 이루는 상아탑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스무 살로 되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있지는 않았을 텐데. 원래 가려던 길은 더 배고프고 더 막막한 길이었는데.



5


  마지막 회를 들었다. 젊은 역사학자 둘이 출연해 진행자와 함께 역사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무리였다. 청취자들의 질문도 받았다. 마지막 질문은 공교롭게도 "자녀가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였다. 질문을 들음과 동시에 혼자 웃음이 터졌다. 짓궂다고 생각했다. 이어진 역사학자들의 대답은, 뜻밖이라기엔 예상대로였고 그럴 줄 알았다기엔 지나치게 씁쓸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역사는 취미로 해도 충분하다고 할 겁니다. 생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문에도 시대적인 흐름의 요구와 필요가 있습니다. 인문학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던 때도 있었지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는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공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모두가 역사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대학교에는 인문학과 연관된 학과들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의 쓸모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해야 합니다.


  역사 공부 많이 하면 반골 성향 되는 거야 모르는 바는 아닌데, 민족주의의 시선에서 국수적인 역사 교육을 시킬 바엔 안 시키는 게 낫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느 정도 동의하며 넘겼었는데, 살짝 흥분하여 빠르게 쏟아내는 젊은 역사학자의 이야기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했다. 너희 집 돈 많아? 라던 물음, 인문학 관련 교수 자리는 있는 TO도 줄이면서 자연공학계열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붓던 대학 측에 분노하던 인문관 앞의 계단, 역사를 가르치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역사 교과가 아니었다면 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이야기했던 최근의 나의 말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에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무수한 것들이 이미 변해온 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조금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부모의 반대에도 역사를 전공하고 싶다던 어린 학생에게 나는 또 앞으로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할는지. 이상은 줄어들고 현실은 가혹한, 그런 나이를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옵티콘과 학교 교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