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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Mar 12. 2021

판옵티콘과 학교 교육

벤덤의 밀랍 인형 앞에서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 

   왼쪽의 그림은 런던 대학의 회랑에서 볼 수 있는 제러미 벤덤의 밀랍 인형이다. 놀라운 것은-보다 끔찍에 더 가까운데-이 밀랍 인형의 골격이 실제 벤덤의 뼈에 짚을 채워 넣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 발아래에는 벤덤의 머리가, 그러니까 실제 그의 머리를 미라로 만든 것이 떡 하니 놓여 있다.

   벤덤은 이를 오토-아이콘(Auto-Icon)이라 불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를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표방했던 그는, 자신의 주검을 의과대학의 해부용으로 기증한 뒤, 실습이 끝나면 유골을 다시 조립해서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다.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어 썩히기보다 시신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자는 주장이었다. 유언대로 그의 사체는 밀랍인형이 되었고, 벤덤이 생전에 애용하던 옷, 지팡이, 의자와 함께 전시되게 되었다. 이 밀랍인형은 그의 요청에 따라 생전에 벤덤이 참가하던 회의에 몇 차례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판옵티콘(Panopticon)』

  판옵티콘은 벤덤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한다. 1791년에 출간된 그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보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제안하면서 창안한 말이다.

  벤덤이 구상한 판옵티콘의 구조는 6층으로 된 원형의 수감 시설과 중앙의 감시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시탑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층에서 각각 두 층의 수감 시설을 감시하게 되어 있다. 감시탑에는 밖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발이 설치되어 있어, 간수의 시야에 모든 죄수들이 들어오는 반면, 수감자들은 간수를 볼 수 없다. 또한 죄수들은 자기들끼리 자유로이 소통할 수가 없다. 정신적 오염에서 수감자 각각을 완전하게 떼어놓기 위해 판옵티콘은 그들을 완벽히 고립시켜서 반성이나 회개에 몰두하게 한다. 죄수들은 동료의 악행을 보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감시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서로를 감시하는 형태는 죄수 동료의 수만큼 감독관이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수감자들뿐만 아니라 하위 감독관들 역시 감시를 받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전체적인 안전에 공헌한다.

제러미 벤덤, 파놉티콘 청사진, 1791


  벤덤은 이러한 건축양식을 그저 감옥의 원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앞으로 지어질 다른 시설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판옵티콘은 이성의 질서 위에 세워진 근대사회 자체의 상징이었다.


  판옵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장은 진정한 산업 건물로서 한 사람이 수많은 작업을 감독하는 편리함을 주고, 개폐가 가능한 다양한 공동주택에는 이 원리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한편 판옵티콘식 병원은 청결함이나 환기, 의약품 관리에서 어떤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는 모두 적용할 수 있다.


  벤덤은 그의 생애와 전 재산의 대부분을 이 판옵티콘 계획을 실현하는 데 바쳤으나, 프랑스혁명의 발발 등 몇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의 기획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오늘날 생각하기로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구조지만,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간수에 의한 죄수의 학대, 비인간적인 대우와 비위생적인 환경, 범죄의 학교로 전락한 교정 시설 등 아직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당시 감옥 시설은 문제가 많았다. 벤덤이 제시했던 판옵티콘은 이 모든 전근대적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이자 휴머니즘적인 대안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

  미셀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은 1757년에 집행된 다미안이라는 국왕 시해 미수범의 처형 장면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이어 푸코는 1840년경 문을 연 최초의 소년원의 엄격한 규칙들을 나열한다. 극적으로 잔인하게 범법자를 고문하고 사형하는 권력의 모습, 그리고 범법자를 철저하게 훈육하고 개조하려는 권력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 뒤 두 가지 상이한 형벌의 방법을 대비시킴으로써 초기 근대 사회와 후기 근대 사회의 권력 형태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부정기적이고 비연속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였던 권력이, 후기 근대로 이행하면서 규율과 훈육을 통하여 사람들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판옵티콘에 실제 감옥 건축 양식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판옵티콘은 근대 사회의 규율적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규율, 규율의 내면화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의 실체. 푸코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라는 충격적인 명제 아래 그의 견해를 담아내었다.

  과거 권력의 주체가 가시적이고 주체가 뚜렷했다면, 근대의 권력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차원에서 행사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권력, 규율적/훈육적 권력은 부르주아 사회의 발명품이며, 산업자본주의와 그에 따르는 사회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한 권력의 효과를 파급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근대 국가의 대표적 제도들인 군대, 학교, 정신병원, 감옥 등이라고 푸코는 주장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개인은 판옵티콘의 감독관, 즉 부재해도 (상상을 통해) 존재하는 감시자를 통해 외적 감시를 내면화하게 된다. 수감자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감시의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는 현상을 흔히 ‘반성’이라 부른다. 자율적 주체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이 ‘반성’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부재하는 감시자를 현존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습관의 산물이지만 그 무엇보다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힘이 있다. 이는 곧 불안과 공포를 통한 완전한 복종, 기계적 복종을 이끌어낸다.



학교 교육과 판옵티콘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생각들, 가령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 역시 엄밀히 말하면 암묵적으로 우리가 교육받은 사회적인 규율이 개인 안에 내면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이 스스로를 향한 자기 검열과 자기 감시를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산업사회에서의 근대적 시민을 양성해내는 학교에서였다. 산업사회의 발달은 다수의 산업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교사 한 사람이 소수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이전 시기 귀족 엘리트의 교육방법은 이러한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근대적 학교 교육은 특정 교실에서 교사 한 사람이 다수의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체식/통제적 교육방법을 선호했다. 일인의 감시자와 다수의 수감자의 관계는 한 명의 교사와 다수의 학생이라는 구조로 변용되었다. 감시자 역시 감시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학교의 형태는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했던 판옵티콘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판옵티콘은 수감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는 ‘고통 완화의 원칙’, 수형자에게 사회의 빈민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함의 원칙’, 그리고 수형자의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공공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경제성의 원칙’의 세 가지 원칙이 투영된 결과물이었다. 이 세 원칙으로 인해 판옵티콘은 인도주의적이고 정의로우며, 효율적인 제도가 되었다. 그러나 판옵티콘은 동시에 만인이 자신과 타인을 감시하는 디스토피아의 표상이기도 했다. 사체 기증이라는 벤덤의 숭고한 뜻이 우리에게 밀랍 인형의 혐오감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판옵티콘의 원리가 투영된 근대적 학교교육이 판옵티콘의 멍에에서, 당혹감을 안겨주는 밀랍인형의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신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는 벤덤의 자기 도상 앞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정용교, 「학교 교육에서 기술 중심적 사고의 확산과 대안 탐색」, 『교육연구』 2005-08, 한국교육정책연구소 편, 서울:한국교육정책원구원, 2005.

진중권, 진중권의 독창적인 책 읽기, 시선의 권력 -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 예스 칼럼, 2010.6.1(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5031&cont=4540).

김호기,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 읽기 ④]조폭은 감옥 갈 때 왜 '학교 간다'고 할까?, 오마이뉴스, 2010.10.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67729).

저자 미상, 파놉티콘, 위키디피아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B%86%89%ED%8B%B0%EC%BD%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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