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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Dec 14. 2022

평등주의에 대한 중국사의 이해

진시황제와 마오쩌둥, 그리고 시진핑


아시아적 생산 양식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경제적 사회 구성이 진보하여 가는 단계로서 고대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근대 부르조아적 생산양식”을 구분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성격의 생산양식으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상정했다. 서구 역사의 발전과 구분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레닌(Lenin)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아시아적 질서의 핵심은 사적 토지 소유의 결여”이며, 아시아의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였고, 따라서 “아시아적 촌은 폐쇄적이며, 자급자족(자연 경제)과 중앙 정부의 공공사업(집단 노동)이 아시아적 질서의 토대”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아시아적 질서는 모든 토지를 소유한 전제군주(專制君主)와 그 아래 왕의 총체적 노예로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전제군주에게 맡겨 놓은 존재로서의 민(民), 그리고 전제 권력에 기생하여 왕에게 수조(收租)의 권리를 하사 받고 백성을 노예로 부리는 데 일조하는 관료 집단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회는 민에 의한 경제활동으로 유지되는데, 전제주의의 질곡 아래의 민에게는 정치투쟁을 수행할 역사적인 힘과 의지를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적 동학(動學)의 완벽한 결여를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아시아에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회혁명”은 非아시아적 정복자인 영국의 행동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르크스의 견해대로라면 이 아시아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동양적 전제의 나라에, 역사적으로 정체(停滯)된 지역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심지어 오늘날까지 그 명목名目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중국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1972년 방중(訪中)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를 만나 마오쩌둥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말로는 닉슨에게 “죽음에 직면한 거인”인 마오쩌둥에게는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며 “후계자가 없다”는 마오쩌둥의 언급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처칠, 간디, 드골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세계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격동적인 역사의 사건 속에 태어났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계자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언젠가 모에게 자신을 16세기의 위대한 중국의 황제들의 후계자라 생각하는가 라고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물론 나는 그들의 후계자.>라고 대답했읍니다.
  그에게는 마술사와 같은 일면이 있읍니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읍니다.


  닉슨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역시 마오쩌둥에게서 어떠한 신비한 감상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기력과 권력과 의지력의 분위기를 발산”한다며, “그가 경멸했던 황제들만큼 세상에서 물러나 신비에 싸인”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서방 세계가 가진 마오쩌둥에 대한 환상의 연원은 이로부터 35년 전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을 만났던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의 기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스노우는 마오쩌둥에게서 “어떤 운명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며, 수많은 중국인의 절실한 요구를 “신비스러울 정도로 잘 종합해서 표현하는 초인적 능력”이 바로 마오쩌둥의 비범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서인가 키신저는 운명적인 힘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이 남자를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와 비교하기도 했다.

  1961년 마오쩌둥은 자신의 경호원 장셴펑에게 스스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좋은 점이 70%이고 나쁜 점이 30%라는 평을 받으면 아주 만족할 걸세. 나는 나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지. 나는 성인(聖人)이 아닐세.” 성인이 되는 데에 관심이 없었던 마오쩌둥은, 그러나 위인(偉人)으로 남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던 모양이다. 문화 대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중국의 대학가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유행가처럼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진시황제를 욕하지 말자.
  분서(焚書) 사건을 일으켰어도 그를 비판하지 말자.
  조룡(祖龍, 시황제를 뜻함)은 죽었어도, 그의 혼 아직 살아 있고,
  공자孔子의 명성 높다 해도 술찌끼(糟糠)에 불과하네.


  공자가 되기보다 “중국 황제들의 후계자”가 되기를 선호했던 마오쩌둥은, 이전부터 중국 내에서 그 존재가 여러 차례 황제의 위치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것은 어쩌면 마오 자신의 바람인지도 몰랐다. 펑더화이(彭德懷)는 중국 도처에 마오쩌둥의 별장이 산재한 것과, 마오쩌둥을 위해서 젊은 여자들을 조달하는 행위에 대해 “황제의 애첩들을 선발하는 짓”이라 비판했다. 1940년대에는 “마오쩌둥 주석 만세!”를 외치고 「동방은 붉다(東方紅)」는 제목의 마오쩌둥 찬가를 부르는 따위의 의식에 반대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펑더화이는 결국 실각하였고 이후 국방부장의 자리를 차지한 린뱌오(林彪)는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본격화해 나갔다. 1960년 1월부터는 전군(全軍)에 마오쩌둥의 인용구를 암기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소홍서(小紅書)』라고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語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이와 같은 작업에 대단히 호의적이었는데, 훗날 오스트레일리아의 마오주의자인 에드워드 힐에게 “(린뱌오가) 내가 한 발언들의 인용구를 편집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집대성한 것이고 불교도 붓다의 말씀을 집대성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오쩌둥 “황제”에 대한 찬양과 숭배의 물결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인민대중은 ‘위대한 조타수’인 마오쩌둥의 사상과 그 개인에게 자신을 종속시켰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이후 그 과오는 전적으로 사인방(四人幇)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주된 책임은 사실상 마오쩌둥 본인에게 있었으며, 그보다 더 궁극적인 원인은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더 뿌리 깊은 역사적 힘, 특히 중국의 오랜 봉건적 전통 때문이라고 간주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봉건 독재의 사상적 ․ 정치적 악영향을 제거하는 어려운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제


  마오쩌둥이 여러 차례 비견되었던 시황제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시황제의 정책과 업적에 대하여는 단순한 사실 여부를 서술하는데 그치는 반면에, 많은 분량을 시황제의 오만과 아집, 사치와 폭정, 그리고 허황된 장생불사 추구를 기록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시황제의 외양 묘사는 대량(大梁) 사람 위료(尉繚)의 목소리를 빌려 옮겨 놓았는데, 벌(蜂), 뿔매(熊膺), 승냥이(豺), 호랑이(虎), 이리(狼)와 같은 맹금이나 맹수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황제의 잔인함을 표현하고 있다. 방사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은 시황제를 가리켜 “천성이 사납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이다. (일개) 제후였으나 천하를 통일하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상고 시대 이래로 자기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진시황본기」의 논찬에서 전한(前漢)의 정론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과진론」의 핵심은 교훈주의 역사관이다. “지난 일을 기억하는 뜻은 훗날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진시황제에 대한 사마천의 비판적인 시선은, 그러한 면에서 당대로서의 한(漢) 무제(武帝)와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사(李斯)의 건의로 이루어진 분서(焚書)와,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이루어진 독존유술(獨尊儒術)에서 보이는 사상 통일이라는 정책의 유사성과 같이, 황제로의 권력 집중을 통해 고대 제국의 완성을 이끌었던 무제의 정책들은 시황제의 그것과 사실상 여러 모로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미신에 빠져 장생불사를 희구했다는 것조차 그러했다.

  시황제와 무제가 형성코자 했던 중국 고대 제국의 기본적인 구조는 균분(均分) 이념에 의한 제민지배체제(齊民支配體制)라는 말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의 혼란으로부터 사회의 균형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제왕권에게 균분의 이념은 필수적이었다. 일찍이 『관자(管子)』에는 “甚富不可使 甚貧不可恥”란 인식 하에 국가가 사회 전체의 재분배에 적극 개입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국가의 적극적인 재분배 기능을 통해 질서를 파괴하는 ‘극심한 가난(甚貧)’도, 국가권력을 차단하면서 사적인 지배관계를 구축하는 ‘극도의 부유함(甚富)’도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균분의 이념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사회의 부를 총괄적으로 장악하고 재분배함으로써 통치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소농민의 노동력을 최대로 조직화하여 그들의 잉여 생산을 최대한 수탈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있었다. 소농민에게 균분의 이념은 나쁠 것이 없었다. 노동력에 상응하는 적정규모의 토지 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킨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는 제민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민의 몰락과 부호(富豪)의 성장을 저지하여 제민 간 계층 분화를 막는 것은 전제왕권의 유지에 필수적인 문제였다. 한나라 무제 시기 염철(鹽鐵)의 전매제를 실시하고 균수․평균법을 통하여 억상(抑商) 정책의 기조를 이어간 것이나, 부호의 세력을 무릉읍(茂陵邑)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고민령(告緡令)을 시행하여 부호 세력의 몰락을 유도했던 것은 제민의 분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국가가 화폐를 적극 주조하고 통용시킨 것 역시 곡물과 수공업품 간의 가격 균형을 유지하고 풍흉(豊凶)에 따른 곡가(穀價)를 조절함으로써 상인의 모리(牟利)를 방지하고 소농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균분의 이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제민의 분화는 황제 권력을 위협하는 사회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 제국 쇠락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호족(豪族)도 부상(富商)도 아니요, 제국의 과도한 수탈과 폭정에 견디지 못한 소농민, 곧 제민의 봉기였다. 진 제국 몰락의 초석은 제국에 의해 노동력을 수탈당하던 징발인들의 둔장(屯長) 진승(陳勝)에 의해서였다. 사마천은 진승을 위해 열전이 아니라 세가를 지어 처음으로 반진(反秦)의 기치를 내걸었던 진승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항우(項羽)를 위해서는 그 기록을 본기로 남겼는데, 이 역시 진을 멸한 공을 항우에게 돌린 까닭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항우, 유방(劉邦)과 시황제의 만남에 대한 전설을 실어 놓았다. 항우가 시황제을 본 것은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마지막 순행으로 강남 지방을 방문했을 때였다. 항우는 그 자리에서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말해 백부 항량(項梁)을 놀라게 했다. 시황제를 본 유방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아아,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와 같이 되어야 한다.” 초나라의 후손 항우가 시황제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었다면 유방의 말은 쟁취보다는 계승에 가까웠다. 이는 실제적인 지배 방침의 차이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초나라의 회왕(懷王)을 의제(義帝)로 세우고 자신은 한 걸음 물러서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었던 항우는 명목적인 황제 아래 제왕(諸王)의 연합을 도모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유방은 시황제와 항우의 중간 형태인 군국제(郡國制)를 선택하여 황제의 자리를 이어나갔다. 따라서『사기』의 일화는 진을 부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던 한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제국은 제민지배체제를 본격화하며 짧은 기간 무너진 진과 달리 고대 제국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역시 황건난(黃巾亂)이라는 제민의 봉기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무너졌다는 점에서 유사한 한계를 표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


  인간의 삶을 틀 지우는 구조로서 심성의 틀은 “장기간 지속되는 감옥”과 같은 것으로 깨트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활 및 사고, 믿음의 방식을 규제하고, 가장 자유로운 정신들의 지적 모험에도 처음부터 어떤 제약”을 가하며 장기간 이어진다. 진과 한의 왕조는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들에 의해 정책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로서 제민이 가졌던 ‘균분’의 이념은 중국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성의 틀로써 작용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이외의 ‘아시아’ 지역의 역사의 특징을 정체(停滯)로 보고, 영국의 인도 지배가 인도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본의 아닌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괴테의 시구를 인용해) 역사적 관점에서 (영국의 식민주의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리라”고 주장하는 등 태생적으로 인종적인 편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토양 위에 큰 거부감 없이 사회주의 혁명의 결실이 맺힐 수 있었던 것은, 고대로부터 지속된 균분 이념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중국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측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미 “관료적 중앙집권화(bureaucratic centralization)” 경향과 “노동자 계급의 노예화(enslavement of the working class)” 위협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레닌은 마지막까지 소련 사회가 아시아적 복고(復古)의 도상에 있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비트포겔은 총체적 정치권력과 총제적인 사회적 ․ 지적 통제를 결합시킨 소련 사회를 가리켜 “실제로 표명된 목적이 무엇이든 10월 혁명은 공업을 기초로 하는 총체적 (국가) 노예제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이에 대한 우려와 갈등은 사실상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중국은 오히려 소련에서보다도 더 빠르게 토지개혁에 이어 농촌 집단화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오랜 기간 중국인을 지배해 온 관념의 틀로서의 균분의 이념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제라는 전제정권의 권위를 인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제민으로서 평등한 존재라는 식의 사고는 마르크스주의적 평등주의와 일정 부분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국민당과의 내전 기간 동안 중국 공산당이 널리 농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경제적 평등을 갈망했던 중국인의 관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잔존한 황제-제민 지배구조의 관념적 틀이 여실하게 드러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66년 7월 16일, 노구를 이끌고 장강을 헤엄쳐 건너며 건재를 과시했던 마오쩌둥의 권력은 이하 제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숭배를 통해 또 하나의 혁명으로 표출되었다. 진시황제와 같은 마오쩌둥의 영도 아래 학생들은 일치단결하여 공산당 내의 이른바 ‘우파 세력’ 척결에 목소리를 높임으로서, 마오쩌둥과 그에 기생한 마오 세력 이외의 모든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는 진승의 외침처럼, 제민은 평등해야 했다. 평등한 인민에게 흑오류(黑五類)와 홍오류(紅五類)의, 쁘띠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의, 도시 부민과 농촌 빈민의 구분과 분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권위와 권력에 대한 폭력적인 조반(造反) 행위가 드러난 것은 과거 제민 체제에 대한 깊은 향수였으며, 이는 동시에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전제적 권력의 치밀한 의도이기도 했다. 제민을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모습이 진의 법가에서 한의 유가로, 또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로 변주되었을 뿐, 그 기본적인 틀은 여전히 유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균분’에 대한 현대 중국의 과제, 그리고 시진핑


  덩샤오핑 이후의 공산주의 중국은 사회주의의 중국 특색적 변용이라는 변주를 거쳐 오늘날 GDP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수치가 말해주는 번지르르한 외양이 궁색하게 느껴질 만큼, 빈부격차, 인권 문제 등 그 실질적인 사회 문제들로 인해 도처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동양적 전제가 이루어지는 중국적 고대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는 일견 옳았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의 해석대로 전제정권은 모든 생산 수단을 국가가 독점한 상태에서 노동력 징발을 통한 대규모의 수리(水利) 사업을 강제함으로써 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억압하여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마르크스는 생산 주체로서의 민의 존재를 총체적 노예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황제의 전제적 권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경제적, 이어 사회적 평등에 대한 제민의 갈망을 충족시켜주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황제와 제민은 사실상 공모적인 관계라 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전제 권력의 기반인 제민은 그 권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이기도 했다. 중국의 고대 제국은 하나같이 제민에 의해 분해되었다. 봉건성에 사로잡힌 전제주의 아래의 민에게서 혁명적인 힘과 의식을 찾아내지 못하였던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2020년 1월 중국의 1인당 GPD가 처음으로 1만 달러의 관문을 넘어섰다. 현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은 권력을 잡은 뒤 덩샤오핑이 약속한 '샤오캉(小康) 사회의 건설'에 수식어를 덧붙여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 건설'을 공언했다. 샤오캉이란 <시경(詩經)> 대아(大雅) 민노(民勞) 편에 나오는 말로, 사회 내에 대체로 갈등이 없고 화목하며, 대부분이 잘 사는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0.467를 기록한 지니계수는 미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도농 간 격차는 계속 벌어질 뿐이다. 저성장과 양극화의 수렁에 진시황제와 마오쩌둥의 후계자, 사실상 황제로 등극한 시진핑의 미래가 여기 달려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심빈(甚貧)이나 심부(甚富)는 통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역사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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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회, 中 `바오파정책` 폐기 "분배없인 더이상 성장 못한다" , 매일경제, 201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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