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긴 기간 거주하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긴 시간 동안 받아온 역사교육의 탄탄한 대지에 쉽게 부러지지 않는 거부감과 분노의 뿌리가 가장 깊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편 그와는 별개로 지금 피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일본은 또 조금은 별개의 모양으로 마치 A와 A’처럼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삶의 환경 혹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와 역사 왜곡에 분노하면서도, 사람들이 저마다 아기자기 예쁘게 가꾸어놓은 꽃과 나무의 정원을 본다든가, 각종 가게며 거리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친절함을 접할 때 뭐라 말할 수 없이 감동하게 된다. 특정인들의 극우적 애국심에 흠칫하면서 동시에 지인들의 따스함과 배려, 세세함 같은 것들은 국적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배움이 있다. 이 양가적 감정이라는 것은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갖고 이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라면 대체로 공감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그 A와 A’의 괴리감은 화학적으로 혼합되어 내 안에 존재한다. 이 A와 A’의 감정은 특히 한국에서 지인들이 이곳에 여행올 때 좀더 뚜렷하게 (내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왜 이 일본을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단 한번도 우리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여전히 극우화된 정당이 지독하게 오래도록 집권하고 있는 이 나라를…? 싶은 마음과 이곳의 예쁨과 세련됨, 맛있음을 느끼게 해주고픈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감정은 다른 여타의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 어느 나라의 해외거주민에게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감정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때로 현재를 위해 과거를(역사를) 차단시키고, 역사를 위해 현재를 차단시키는 듯한 감정이 들 때도 있다. 국제 결혼이 아니어서 굉장히 다행스럽다고도 늘 생각한다. 그들이 자녀를 갖게 되면 그 고민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겠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런 이유들로 여전히 일본과 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현해탄보다는 좁지만 꽤 견고한 벽으로 막혀 있다. 달콤한 팥죽으로 된 벽이어서 다 먹으면 해체되는 종류의 것은 아닌 듯 하다. (어릴 때 그 동화를 읽으며 난 팥죽을 좋아하니까 다 먹을 수 있다고,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괴리가 조금 거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치우고 버려야할 것은 또 아니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은 약간은 부담스러운 여행자의 짐처럼 붙들어매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짐을 잃어버린다면 몸은 가벼워질지라도 마음은 더 무거워질테니.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