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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나 Nov 03. 2021

이어폰의 노예에게 음악적 공간의 환상을 알려주다

Rødhåd의 <Target Line>


이런 순간이 제일 슬프다. 이 노래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 순간 말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메모의 중요성을 강요하나 보다. 나의 일상을 형형색색으로 꾸며주는 요소들과 어떤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나의 삶을 그리고 나 자신을 경시하는 태도다.


여기의 음악일기는 삶의 의무를 외면해 온 나의 반성이자 착실한 기록을 위한 실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계기로 테크노를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언제부턴가 Spotify의 [Techno Bunker]가 자주 찾는 플레이리스트 상위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테크노인지, 어쩌다 매일같이 듣기 시작했는지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었지만 단어 하나 건지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만남의 과정보다는 만남 이후에 더 집중할 수밖에.


듣고 그저 ‘좋다’만 연발하는, 관련 지식을 쌓는 일에는 조금 게으른 문화 소비자가 테크노라는 장르의 특징을 설명하긴 쉽지 않다. 인터넷의 여러 웹페이지에 실린 설명 또한 명확한 테크노의 윤곽을 보여준 것은 아니기에 우선은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그래도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1. 197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악기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연주하는 전자음악 중 하나로,

2. 4/4박자로 구성되는 곡이 많으며,

3. 기계음이 반복되는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테크노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는 반복되는 육중한 비트 때문이다. 일정한 박자의 끊임없는 반복을 단조롭다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3~5분 안에 서사 하나를 녹여내는 여타의 노래와 음악을 오래 들어온 경력도 있어, 테크노 감상 초반에는 이 단조로움이야말로 지루함 그 자체였다. 짧으면 5분, 길면 10분 이상의 연주 시간 또한 근접하기 힘든 요소 중 하나였다. 처음 플레이리스트  [Techno Bunker]에 실린 곡들을 들을 때 “아니 뭐가 이렇게 길어!”를 연발했다. 물론 지금은 일부러 10분 이상의 곡을 골라 듣는다. 반복되는 비트가 주는 안정감 때문이다.


그렇다!

반복되는 육중한 비트가 주는 안정감.

내가 테크노를 찾고 또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육중한 사운드는 견고한 벽돌이 되어 의식이 걸어갈 길을 만들어 준다. 계속되는 비트는 의식이 걷고 싶은 방향을 따라 벽돌을 깔아준다. 그러니까 테크노는 의식과 무의식이 걷고 싶은 길을 내 머릿속에 만들어 주는 주문과도 같다. 음악이 쌓아 올리는 길을 걷는 그 짜릿함이란!

   

이 단단한 길을 단순히 ‘음악 감상’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음악 감상이라면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와 멜로디에 집중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감상’이라고 분류할 수 없는 순간에도 테크노가 만드는 길은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묵직하고 둔탁한 비트는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 긴장될 때 일정한 박자감으로 내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도와준다. 규칙적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가쁜 숨도 어느덧 리듬을 되찾는다. 책을 읽을 때도 낮은 음의 ‘쿵쿵 쿵쿵’ 소리는 집중을 돕는다. 동일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가 주변을 잠잠케 하고 내 머릿속을 부유하는 잡생각도 눌러준다. 그 비트와 함께 문장을 따라가면 어느덧 꽤 넘어간 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아침에 눈 뜨자마자 테크노 멜로디를 찾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이렇게 테크노의 매력을 일상의 장면에서 발견하고 또 만끽하던 중 만난 나만의 명곡은 Rødhåd의 <Target Line>이다.

이 또한 늘 그렇듯 spotify의 플레이리스트 [Techno Bunker]의 추천이었다.(그렇다. 난 알고리듬의 노예다)

  

큐피드가 쏘는 화살이 가슴에 팍 꽂히는 그 느낌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나와의 만남이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는, 그래서 만날 수밖에 없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찾아오는 그 느낌!  네 번의 쿵쿵 쿵쿵 소리가 끝나자마자 그 찌릿함이 나를 관통했다.


‘이거야! 이거~!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사운드~! ‘


 Rødhåd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테크노는 청각을 자극하는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는 장르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멜로디를 통해 어떤 장면이나 장소를 연상시킨다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공기의 성질을 바꿔버린달까.


<Target Line>이 딱 그랬다. 박자감 강한 저음이 귀에 스며듦과 동시에 나의 피부를 감싼 것은 깊은 동굴 안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였다. 순식간에 사라진 열기 때문에 내 온몸은 닭살로 가득해졌다. 싸늘함이 피부를 자극하면서 밀려오는 짜릿함. 여기에 진짜 찬 공기의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짜릿함이 리듬과 함께 내 몸을 타고 흐른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서 조용히 감상하는 것, 나에겐 이 방식이 최적의 ‘음악 감상’ 형태였다. 평소에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가 있다 하면 앞뒤 없이 티켓을 예매한 적도 많다. 하나 장소에 따라 기대했던 만큼의 사운드를 들려주지 못하는 콘서트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현장의 생동감보다는 정교히 녹음된 사운드를 추구하는 편이다.


좋은 이어폰이나 헤드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던 나의 음악 감상 방식에 풍파를 일으킨 것이 바로 Target Line이었다. 이 곡을 처음 듣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듣기를 반복해 가면서 지금껏 상상도 못 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이 육중한 사운드로 꽉 찬 공간에 서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중저음의 강력한 비트가 청각과 더불어 피부에도 전달된다면 테크노라는 장르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Target Line>으로 촉발된 ‘욕망’은  테크노의 성지라 불리는 [베르크하인Berghain]에 도달했다. 베를린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는 대표 클럽.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어서 매력적인 곳. 그래서 베르크하인을 검색하면 DJ 리스트에 앞서 어떤 복장으로 어떤 표정으로 베르크하인의 유명한 문지기와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모니터를 채운다. 그런 베르크하인에 가면 상상으로만 빚은 ‘모호한 감각’과 조우할 것만 같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테크노 특유의 저음에 맞춰 몸과 머리를 흔들어댄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핸드폰과 이어폰만 있으면 장소에 관계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음악과 관련한 장소의 상징성이 흐려진 지 오래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나에게 음악과 관련된 ‘특별한 장소’를 향한 열망을 심어준 테크노.

코로나 19 덕분에 꽤나 어려운 미션이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이 소망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굳게 닫힌 국경과 하늘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베를린을 향해 날아가고 말 테다. 천운이 따라 Rødhåd의 디제잉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사족 1)

지극히 개인적인 ‘테크노 찬양(?)’은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테크노 초보에다가 실제로 테크노 클럽에 가 본 적도 없는 날 안달 나게 하는 이들을 소개하는 자리다. 사적인 성격의 기록이라서 유익한 정보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는 불필요한 것들이 개성의 원천이며 종국에는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나름의 철할 때문이다. 순진하다 생각해도 괜찮다. 아니 어쩔 수 없다. 이 기묘한 고집 좀 바꾸려고 꼬물거려봤는데 별 변화가 없는 거 보면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으니까.


사족 2)

집중해야 할 때에 일정한 비트가 도움을 준다는 건 그저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다. 일본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학부 수업 하나를 청강한 적이 있다. 학부와 대학원 전공이 다른 데다가 진학 대학원은 일본 내에서도 특별한 곳으로 분류되는 만큼, 학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나에게 학교 분위기 좀 익히라는 지도 교수 나름의 배려였다. (풋풋한 신입생들과 듣는 수업은 여러 모로 재미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미디어 연구 특히 대중음악 문화사를 연구하신 교수님의 수업은 바닥이나 마찬가지인 음악적 지식을 쌓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수업 첫 장에 등장한 아티스트가 kraftwerk였고 수업 발표를 담당한 학생은 kraftwerk의 음악은 처음이라며 관련 음악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의 음악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수업 교재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그 학생은 kraftwerk의 음악을 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업할 때 굉장히 좋은 음악이더라고요. 이번 수업을 계기로 접한 이후 발표 준비를 할 때도 작품을 제작할 때도 요즘은 자주 kraftwerk의 음악을 틀어 놓아요. 뭔가 안정감이 있달까요? 그래서 지금부터 kraftwerk의 음악을 BGM으로 발표를 시작할까 합니다. 발표하는 데 무슨 음악이냐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묘한 안정감을 느끼실 겁니다. 진짜로요.”


그렇게 그가 누른 플레이 버튼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몇몇 학생들을 그 공간에 잡아 두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경험 이후 단조로운 멜로디로 안정감을 꾀하고 싶을 때 종종 kraftwerk를  찾는다. 혹자는 심심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미묘한 매력에 빠지면 쉽게 끊기 힘들걸.



사족 3)

한 번은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베를린에 사는 스웨덴인 친구에게 베르크하인을 가 보았냐고 물어봤더니 갔단다. 꽤 자주 방문했다는 그의 말에 의하면 단체(라고 해봤자 2~5인)로 가서는 입장이 힘드니 만약 우리가 가게 된다면 각자 입장해야 할 것이라며, 나의 단순한 질문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베르크하인의 문지기를 몇 번 경험한 친구는 ‘나 같이 눈에 띄는 개성도 없는 데다가 비루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들어갈 수 있기는 한 걸까?’하는 내 우려를 잘근잘근 짓밟아 주었다.

심지어 ‘너와 나’는 결코 퇴자 맞지 않을 거라며 이유모를 자신감도 내비쳤다. 타인의 게이다를 은근히 자극하는 그의 언행을 쉬이 지나칠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누가 봐도 개성 강한 친구를 앞에 두고 너무도 평범한 무채색의 나에게 입장이 허락될까 하는 염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본격적인 베르크하인 방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걸 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둔감하다고 해야 할까? (결국 코로나 때문에 계획은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사족 4)

 “요즘 테크노가 참 좋더라고요”라고 말하면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대부분은 이정현을 언급한다. 배우인 그녀가 갑자기 가수를, 그것도 테크노라는 장르를 들고 나와 미디어를 점령하던 그 시절,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나는 여전히 테크노-이정현을 연결 짓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테크노 러버 고백(?) 이후 이정현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래도 ‘테크노’라는 장르를 널리 알린 그녀의 업적에는 감사해야겠지?(무려 테크노의 여전사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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