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봉평에서 문학 걷기

2025 평창 효석문화제 참가기

by 김은진

해마다 메밀꽃이 피어나면 생애 단 한 번인 첫사랑 이야기가 봉평에서 피어난다. 지난 5일, 기다림까지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으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평창 효석문화제’가 시작되는 첫날로 봉평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었다. 이번 효석문화제는 ‘문학! 메밀꽃으로 피고, 삶! 달빛 스미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아침에 청량리에서 KTX 열차를 타고 1시간 12분 만에 평창역에 도착하니 행사장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봉평 시장에 도착했다. 봉평 5일장은 2일과 7일에 서지만 ‘효석문학제’가 열리는 동안은 장터가 계속 열렸다. 옛 장터의 모습은 없지만 흥겨움과 목을 축일만한 곳은 넉넉했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터는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살이 벌여 놓은 전의 휘장 밑으로 들어와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메밀꽃 필 무렵 중


봉평 시장에서 찻길을 건너면 흥정천이 보였다. 삶이 온전한 기다림이었다고는 못해도 아련한 그리움이었다고 할 수 있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하천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흥정천을 바라보니 달빛 아래서 강물을 건너던 허생원과 나귀 그리고 동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허생원과 동이가 혈육의 정을 느꼈던 강물이라고 생각하니 남안교를 건너면서도 미소가 번졌다.

문학관으로 가는 마을 입구에 ‘달빛흐뭇 낭만공원’이 보였다. ‘피기 시작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펼쳐져’ 풋풋한 옛 추억을 매달고 살랑거렸다. 9월이 시작되었지만 정오의 햇볕은 강했다, 먼저 문학관을 보고 내려와서 메밀밭을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산자락 밑에 위치한 물레방앗간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잠시 더위를 식힐 겸 들어가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인연을 떠올렸다.

이렇게 더위가 끝날 무렵이면 사람들 가슴 속에 뭉근한 추억이 피어오르게 하는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어떻게 쓰여지게 된 걸까. ‘이효석 문학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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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앗간에서 얕은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올라가면 이효석 문학관 입구에 도착한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니 최두열 문화관광해설사에게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가산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우경산 밑에 있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효석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한성 사범학교를 나와 1910년경부터 서울 근교에서 교편을 잡는 바람에 이효석도 서울에서 살다 1912년 진부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8살이 되던 해 평창 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집과 너무 멀어 평창에서 하숙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학에만 집으로 오고 평창에서 유학했다.

그 후 평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효석은 주로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고 특히 안톤 체호프의 소설을 좋아했다고 한다.

1928년 <조선지광>에 실린 단편 「도시와 유령」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 이효석은 카프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념에 동조하여 작품을 썼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상륙」, 「북극사신」을 발표했다. 대학 시절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나 취직자리를 얻지 못해 생활은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그러던 중 공립고등여학교 졸업반인 이경원의 그림에 반해 1931년 7월 함북 경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경성제국대학만 나오면 바로 취직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교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와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취직했다. 그러나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평론가 이갑기로부터 “너도 개가 다 됐구나”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는 열흘 만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그 당시 조선의 작가가 총독부에 취직했다는 것은 변절의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나 이효석은 경성농업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하고 이때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생활도 여유가 생겼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교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평양 창전리에서 「화분」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푸른 집’이라 불리는 붉은 벽돌집에서 살았다.

최두열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푸른 집에서 「메밀꽃 필 무렵」, 「산」, 「들」, 「고사리」 등 자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글을 남겼다. 최두열 문화관광해설사가 문학관 한쪽 벽에 적혀 있는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시적 문장을 낭독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 중


이를 두고 동시대의 소설가 김동리는 “이건 소설이 아니고 시야, 시(詩). 그래서 당신은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야”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이효석은 영화 감상을 좋아하여 한 달에 7~8회나 영화를 관람했다. 그는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 다니유의 열혈 팬이었다.

문학관에서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작가의 집필실에도 다니엘 다니유의 사진이 있었다. 최 문화관광해설사가 이렇게 여배우의 사진을 걸어 놓고 온통 여배우의 사진을 모으면 부인의 심정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관람을 온 한 청소년이 손을 들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미칠 것 같고 저라면 남편이 하는 짓이 보기 싫어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모두 웃으며 동의했지만 이효석의 부인인 이경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얼마든지 예술적 영감을 받으라고 했다. 이렇게 현명한 부인을

이효석은 1940년 복막염으로 떠나보내고 차남 영주도 홍역으로 잃는다. 아내가 죽고 2년 후 그도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다가 입원해 5월25일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고향에 대한 연민과 애착을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최고의 근대 단편소설가 이효석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이효석과 유진오는 막역한 사이로 이효석이 사망한 후에도 유진오는 남은 자녀들의 후견인이 되어 돌봐주었다고 한다. 이효석 문학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달빛 언덕으로 향하면 이효석의 생가와 푸른 집을 재현해 놓았다. 빨간 벽돌집이 푸른 담쟁이넝쿨로 덮여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가의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취미가 느껴졌다. 평소에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를 잘했다고 한다. 아름다움과 진지함,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그의 작품이 긴 연주를 듣는 듯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학관에서 나와 메밀꽃밭으로 향했다. 지금도 메밀밭이 상당히 넓었지만 1930년도에는 메밀밭이 더 넓었을 것이다. 옛 정취를 살리기 위해 메밀밭 길은 구불구불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메밀꽃은 하얗고 줄기는 푸르고 싱싱했다.

넓은 메밀밭을 거닐며 인연과 운명에 대해서 잠깐 감상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메밀꽃들은 앞으로 펼쳐질 무수한 하루하루 인양 느긋하고 아련했다. 연한 줄기에 핀 꽃이 작은 바람에도 흔들려 햇빛을 따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방문객들은 사진을 찍고 벤치에 앉아 넘실거리는 하얀 메밀꽃을 바라보았다.

메밀밭 입구에는 평창군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효석 문학관에서 7장의 이효석 작가의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 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문학관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기 때문에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봉평 이효석 마을에서 개최 중이다. 손글씨 쓰기, 삼생시 짓기, 시짓기, 사진전 등 다양한 문학프로그램과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니 문학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봉평나들이를 추천한다.

메밀꽃밭에서 풋풋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이야기처럼 아련한 첫사랑도 떠올려 보시길. 축제는 9월 14일까지. 2025년은 메밀꽃밭 입장은 무료.


* 이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메밀꽃이 피면 봉평에 가야합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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